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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친구와 놀고 싶다”는 아홉 살 된 아이를 따라 놀이터에 갔다. 아이의 친구가 사는 아파트에 딸린 단지 내 놀이터였다. 친구를 포함해 또래 몇몇이 금방 어울렸다. 마침 가까이서 아이들끼리 하는 대화를 엿들었다. “난 ○○○(아파트 브랜드)에 사는데, 넌 어디 살아?” 그날 처음 만난 한 아이가 내 아이에게 물었다. 아이는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 뜸들인 뒤에야 “어?… 몰라… 어디 사는지 몰라”라고 얼버무렸다.
어디에 사는지 물을 때부터 나 역시 가슴이 ‘철렁’했다. 지극히 ‘평범한’ 내 아이가 어디에 사는지도 모르겠는가. 아파트가 아닌 우리집은 공교롭게도 건물 이름조차 없다. 그렇다고 집주소를 외우는 것도 아니니, 그냥 모른다고 말한 것이다. 언젠가 아이는 “왜 우리집은 이름이 없어?”라고 물은 적이 있다. 복잡한 생각이 들었다. 내 아이가 당황한 지점은 어디일까. 건물 이름이 없으니 마땅찮아 둘러댄 것일까, 아니면 “난 저기 건너편 빌라에 살아”라고 말할 어휘 수준이 안 되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난 빌라(다가구주택) 살아”라고 말하는 게 창피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내가 철렁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돌아오는 내내 마음이 어지러웠다.
이 땅에서 집이란 곧 부의 척도를 의미한 지 오래다. 여간한 고급 빌라가 아니고서야 아파트값이 빌라값의 몇 배에 달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누군가 나에게 “어디 사세요”라고 물을 때마다 슬쩍 기분이 움츠러드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젠가부터 누군가의 집으로 ‘래미안’ ‘자이’ ‘푸르지오’ 등과 같은 아파트 브랜드를 들을 때마다 ‘어디쯤 사는구나’라는 생각보다는 ‘얼마쯤 가졌구나’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런 속된 생각은 아파트 단지의 이름을 짓는 ‘네이밍’이 점점 복잡해지는 현상을 보며 더 짙어진다. 요즘 이른바 ‘핫한’ 지역의 아파트들 네이밍에는 ‘퍼스트’ ‘프레스티지’ ‘프리빌리지’ 등의 단어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네이밍에 따라 아파트값이 변한다는 건 다 아는 사실이다. 집주인 입장에서는 되도록 부르기 좋고 집의 가치도 높일 수 있는 네이밍을 선호하는 것 역시 너무나 당연하다. 다만 계층을 상징하는 말이 단지 이름에 하나둘씩 추가될 때마다 거리감이 더 느껴지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네이밍에 공을 쏟는 건설사들이 지역사회 구성원 간 ‘단절’을 더 부추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요즘 유행하는 ‘○○○○시티’ ‘○○○○파크’ 등의 네이밍도 이질감이 드는 건 마찬가지다. 건설사들은 보통 대단지 아파트에 이런 이름을 제시하는데, “랜드마크로 짓겠다”는 그들의 취지와는 달리 이름만 들어선 아파트가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알기가 어렵다. 주변에도 여러 ‘시티’와 ‘파크’가 있지만, 얼마나 잘 지어놨는지 한번 가볼까 하다가도 머뭇거려지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오늘 저녁엔 아이에게 “이참에 우리 빌라도 이름을 짓자”고 해야겠다. 구청에 정식으로 등록할 생각은 없다. 적어도 친구에게 말 그대로 ‘어디’ 사는지는 알려줄 수 있게. 개인적으로는 ‘개나리’ ‘진달래’ 등과 같은 꽃이름을 좋아한다. 이를테면 ‘진달래빌(라)’. 멋지지 않을까.
<송진식 경제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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