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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11일, 최악의 시나리오가 이야기되었다. 반경 250㎞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피신한다. 10년, 20년, 30년 동안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도 없다. 그 수는 무려 5000만명이다. 갑작스럽게 자기가 살던 터전을 떠나 250㎞ 바깥으로 이동한다고 상상해 보자. 집을 버리고, 마을을 버리고, 직장을 버려야 한다.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는 것이다.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전쟁도 가장 큰 비극이지만, 곧 끝나리라는 희망은 있다. 하지만 이 최악의 시나리오는 10~30년 동안 지속된다.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 때 일본 총리였던 간 나오토는 당시 상황을 무겁게 회고했다. 그는 일본 원자력위원회 위원장 곤도 슌스케가 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이야기했었다고 말했다. 만약 한국이라면 어떨까? 고리 원자력발전소를 중심으로 250㎞의 범위는 삼척, 평창, 충주, 세종, 군산, 강진에까지 미친다. 한국의 3분의 2에 해당한다. 암울하고 두려운 상상이다.
간 나오토 전 총리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원전은 “다음 세기에는 결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기술”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사고 수습 최고 책임자였던 그는 사고 원인을 첫째가 대지진과 쓰나미에 의한 완전 정전이었고, 둘째가 도쿄전력과 정부가 적절한 예방조치를 하지 않아 인간이 만든 재해였다고 했다. 우발적 자연재해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재(人災)였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간 나오토 전 총리는 “가장 안전한 에너지 정책은 원전을 보유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하게 말했다. 이 이야기는 헨리 캘디콧이 엮은 <끝없는 위기>(글항아리, 2016)에 나온다.
지난 8월30일, 산업통상자원부가 ‘제10차 전력수급기본 계획(전기본)’ 총괄분과위원회 실무안을 공개했다. 제10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2022년부터 2036년까지 청사진을 담고 있다. 한국의 미래와 관련된 예민한 문제이기에, 원전과 관련된 내용에 눈길이 먼저 갔다. 2030년까지 원전 비중이 32.8%로 높아진다. 이는 ‘제9차 전기본’의 25%보다 7.8%포인트 높아진 것이다. 2021년 문재인 정부 시절 확정했던 ‘2030 국가온실가스감축목표(NDC) 상향안’보다는 원전 비율이 8.9%나 상승했다. 윤석열 정부는 ‘탈원전 정책 폐기’를 공식화하는 위험한 첫발을 내디뎠다. 그 기본 방향은 ‘탄소중립 이행의 중요한 수단으로 원자력을 활용한다’는 것이다.
‘제10차 전기본’ 실무안에 따르면, ‘2036년까지 12기의 원전을 계속 운전’하고, 2022년부터 2025년까지 신한울 1·2호기와 신고리 5·6호기를 준공한다. 2032년부터 2033년까지 신한울 3·4호기도 건설한다.
이 실무안에서 원전과 관련해 눈길을 끄는 표현이 있다. “(원전) 사업자의 의향을 반영”하여 이와 같은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국가의 발전설비 계획을 원전 사업자들이 주도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원전 전문가들과 원전 사업자들이 에너지 정책에서 ‘독점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할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의 미래에 태풍보다 무서운 엄청난 구름이 몰려오고 있다. 미래 세대의 운명에 너무 깊이 개입하는 정치적 결정들이 원전 전문가들의 주도로 이뤄지고 있다. 원전은 국가 전체를 위기에 빠뜨릴 수 있는 위험한 에너지이고, 사용 후 핵연료 처리 문제를 고려할 때 절대 저렴한 에너지원도 아니다. 지금 세대의 경제적 풍요를 위해 ‘오염된 지구’를 미래 세대에게 물려줘서는 안 된다. 원전이야말로 지금의 풍요를 위해 미래에 있을 불행의 씨앗을 곳곳에 뿌리는 것과 같다.
간 나오토 전 총리는 “인류가 원자를 조작해 에너원으로 쓰는 원자력발전의 길을 여는 순간, 지구상의 생명과 공존할 수 없는 기술”을 만들어냈다고 했다. 작고한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선생도 “전력이 부족해도 인간다운 삶은 얼마든지 계속될 수 있지만, 핵분열에 의한 환경 파괴는 삶의 종식을 의미한다”고 경고했다. 미래 에너지 정책은 풍력·태양광·바이오매스 같은 신재생에너지 확대로 바뀌어야 한다.
원전 전문가들이 지식을 독점하고, 의사결정에 절대적 영향을 미치면 시민 민주주의는 설 자리를 잃게 된다. 10차 계획안은 연말까지 확정될 것이라고 한다. 한국사회와 지구의 미래를 생각할 때, 일부 원전 전문가들은 민주주의 적이 되어가고 있다. ‘탈원전 정책’을 폐기하려고 하는 원전 전문가들의 결정을 막을 수는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2036년까지 한국사회를 위험에 빠뜨릴 에너지 정책과 관련한 결정들이 반대도 없이 통과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개입하지 않으면, 바뀌지 않는다.
<오창은 문학평론가·중앙대 교수>
연재 | 정동칼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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