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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다린다. 9월24일을. 그날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올 것이다. 오후 3시,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부터 기후정의행진이 시작된다. 2019년 대학로에서 열린 대규모 기후위기 집회 이후로 가장 큰 규모의 집회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내가 속한 모임도 4일 모여 회의를 했다. 우리는 조금 일찍 만나 커다란 깃발을 만들기로 했다. 각자 깃발에 붙일 상징들을 하나씩 가져와 붙일 계획이다. 오랜만에 깃발을 들어보겠다.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니까, 기후정의와 관련된 책을 들고 와서 길거리 독서회도 하기로 했다. 여기저기 속한 단체들이 다 나온다니, 어느 깃발 아래서 행진을 해야 할지 즐거운 고민을 한다. 누구는 몸에 풀을 붙이고 온다고 하고, 누구는 허리춤에 호미를 차고 온단다. 누구는 개구리의 전령이 되어, 누구는 산양과 멧돼지의 얼굴로, 나타날 것이다.
사람들이 든 피켓에는 ‘이대로 살 수 없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 문장은 지난 7월 대우조선 하청지회 파업 당시 3.0평 용접감옥에 스스로를 가두었던 유최안 노동자가 세상을 향해 던졌던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한 노동자의 외침에서 시작된 물음은 더 멀리, 더 크게 울려퍼져야 한다. 그건 이대로 살 수 없는 모든 존재의 외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대로 살 수 없다, 삭감 임금 복구하라, 이대로 살 수 없다, 노동시간 감축하라, 이대로 살 수 없다, 비정규직 철폐하라, 이대로 살 수 없다, 화석연료, 투기자본 규제하라, 이대로 살 수 없다, 안전한 주거 대책 마련하라, 이대로 살 수 없다, 불평등 사회 끝내자, 이대로 살 수 없다, 공장식 축산 중단하라, 이대로 살 수 없다, 개구리도 뜨거워 못 살겠다, 이대로 살 수 없다, 이대로 살다가는 물도 없고 에너지도 없다, 이대로 가다가는 농사도 없고 식량도 없다, 성장의 질주를 멈춰라!’ 우리는 외치며 행진할 것이다.
흩어져 있던 목소리들이 함께 모일 때, 이 문제들이 모두 연결되어 있음이 드러날 것이다. 지금 눈앞에 닥친 위기가 어떤 위기인지 비로소 알게 될 것이다. 이 위기는 단지 예측할 수 없는 기후 문제나, 대기 중 탄소량 과다의 문제, 에너지 부족과 연료 대체 문제로 이해해선 안 되는, 그 모든 것들을 야기하는 ‘자본주의 성장체제’의 문제이며 정치적 문제라는 것을. 이처럼 집회는 각자의 이야기를 모두의 이야기로 바꾸어내며, 사적인 문제가 정치적인 것임을 깨닫고, 일상 속에서 드러나지 않던 정치적 진실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 힘의 크기를 보여주는 장이다. 한 사람이 외치면 바꾸기 힘든 것을 백 사람, 만 사람이 외치면 바꿀 수 있다. 그것이 집회의 힘이고 그래서 우리는 집회를 한다.
이제는 기후위기를 외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증상에만 주목하고 원인은 외면하는 주류 기후위기 서사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자본과 정부, 미디어와 전문가들이 만든 ‘탄소중립’ 프레임에서도 탈피해야 한다. 지금 다가오는 태풍도,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마스크의 일상도, 혹독한 가뭄, 폭우와 홍수도, 모두 위기를 알리는 자연의 징후이자 증상들이다. 이런 징후들이 가져올 피해도 치명적이기에, 이미 나타나고 있는 증상으로부터의 고통을 돌보고 경감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증상을 야기하는 근본 원인에 저항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날 더 많은 사람들이 탄소중립이 아니라 배출제로를, 기후변화가 아니라 체제전환을 외치기를 바란다. ‘이대로 살 수 없다’면, ‘이대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말해야 한다. 기후 재난은 자연이 만든 재난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만든 재난이다.
그동안 수많은 기후협약과 탄소감축 선언에도 불구하고, 기후위기는 더욱 심화되어 왔다. 대표자들의 합의나 기업의 자발적 책임, 이행 관리라는 방식은 기술과 시장에 기댄 탄소 조절주의 정책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지난 역사가 보여주듯이 성장의 위기가 닥칠 때는 노동탄압과 시민권 축소 등 정치적인 억압의 강도도 함께 높아진다. 신자유주의라는 경제성장의 돌파구는 대다수 민중에겐 얼마나 혹독한 재난이었나. 상상하지 못한 기후위기는 상상하지 못한 정치적 파국도 함께 예고한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그와 같은 경로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의 압력이다. 물론 하루의 집회로 해결될 수는 없다. 9월24일이 이어질 수많은 저항의 날들을 시작하는 하루이기를 바란다. 이제 광장을 열자. 서로의 고통을 만나고, 서로의 위기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대표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가진 힘을 믿기 위해서. 9월이여, 오라.
<채효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장>
연재 | 정동칼럼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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