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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시선

이기적 연대

opinionX 2021. 5. 24. 09:44

법치가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위해 필요하지만,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법치는 모든 사람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 선택한 수단 중 하나다. 오랫동안 범죄자 교육과 상담을 해온 오카모토 시게키 교수는 그의 책 <반성의 역설>에서 이렇게 말한다.

“수형자의 책무는 행복해지는 것이다. 죄를 저질러 놓고 뻔뻔하게 행복해지라니 당치도 않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행복해지는 것이야말로 갱생과 깊은 관계가 있다. 남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행복임을 알게 되면,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해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점점 자신이 피해자의 소중한 그 무언가를 빼앗았다는 사실에 괴로움을 느끼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수형자가 행복을 느끼면 느낄수록 죄책감도 점점 강해진다. 이렇게 모순된 두 감정을 안고 살아가는 것은 괴롭고 힘든 형벌이다.”

얼마 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소령이 용서를 구했고, 유가족은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깊었던 정신적 고통이 조금이나마 정화되었을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연대할 수 있을까. 사회적 배상을 통한 연대는 가능할까.

서민이 경제적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고, 장애인의 일자리를 획기적으로 늘리고, 기업의 투명성을 한층 높이고, 더 많은 공익 변호사가 활동할 수 있게 사회적 배상을 통한 연대로 용서를 구한다면, 이재용 부회장의 손은 잡아줄 수 있을까. 사면은 가능할까. 그런데 사회적 배상을 통한 연대를 죗값으로 인정하는 것은 자칫 현행법상 뇌물에 해당할 수 있다. 연대는 자발적이어야 하며 조건 없이 먼저 시작되어야 한다. 즉 거래가 아닌 진짜 연대여야 한다.

지난 10일 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합동으로 한 국민여론조사에서 이재용 부회장 사면에 대해 찬성이 64%, 반대가 27%였다. 64%의 응답자가 부도덕하고 불공정한 사람들이어서 찬성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면에 찬성한 응답자도 사회적 배상을 통한 연대를 상상하지 않았을까.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지 않다. 재판정이 정의롭고 평등하다 할지라도 버거운 삶에 갇혀, 돈도 시간도 없는 사람은 재판에 대응할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으면 법 앞에 평등할 수 없다. 법 앞에 평등만을 강조하는 것은 현실적 불평등을 재생산하는 일이다. 행복이라는 궁극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실질적인 법치를 고민해야 할 때다. 우리의 삶과 사회에 실질적 이익이 될 수 있는 좀 더 이기적인 방법이 필요하다.

범죄자가 교도소 밖을 활보하는 광경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다고 죗값을 치르는 방법이 오로지 교도소 수감이라는 것도 무능하고 후진적이다. 좋은 사회일수록 죗값을 묻는 방식도 효과적이고 다양해야 한다. 최근 정치권에서 재산·소득 비례형 벌금제가 언급되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국민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76%가 경제 사정에 비례해 벌금을 부과하는 제도에 찬성했다. 이러한 제도가 오래전부터 유럽 국가 일부에서 잘 시행되고 있다고 한다.

이 글을 쓰기 전에 이재용 부회장 사면에 대해 변호사·공인회계사와 대화해 봤지만, 동의를 구하지 못했다. 왠지 비난이 쏟아질 것 같다. 하지만 댓글 환영이다.

최정묵 비영리공공조사네트워크 공공의창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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