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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의 향토사학자 이우형씨가 일행을 ‘끌고’ 간 곳은 웅연(熊淵)의 귀신 글씨 현장이다. 신시(神市)에서 내려와 목욕하던 곰은 온데간데없고, 해거름에 침묵의 임진강은 굽이굽이 남북을 휘감아돈다. <기언(記言)>에 실려 있는 문장이 증언하는 미수 허목의 눈은 칸딘스키를 뛰어넘는다.
“이튿날 웅연 석문(石文)의 귀신 글씨를 보았다. 글자는 괴괴기기(怪怪奇奇)하다. 필획은 수직 수평으로, 합해지고 흩어지면서 끝없이 변동한다. 이것은 기화(氣化)가 이루어낸 귀신 필적이다(웅연범주도기·熊淵泛舟圖記).”
미수는 이미 현대추상미술의 수직선·수평선의 이합집산 원리를 수형(竪衡)과 합산(合散)의 천변만화로 간파해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미수체의 아름다움으로 녹여내고 있었다. 웅연은 물론 임진강 ‘썩은소’와 같은 미수의 정원이자 뱃놀이터에 즐비한 태고의 현무암 주상절리의 결정구조야말로 미수예술의 뿌리다. 미수체가 삼대고문(三代古文)의 조선화에서 끝이 난 것이 아니었다.
미수의 통찰은 최근 106세로 작고한 한국추상미술 1세대 작가 김병기가 자신의 작품에 내린 평가와도 다르지 않다. “화면에 굵게 그어진 가로, 세로, 대각의 직선 사이로 드러나는 형태와 색채가 특징이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선들은 화면에 평면적 성격을 부여한다. 동시에 그 교차로 만들어지는 역삼각형이나 미묘한 형태들이 3차원적 공간감을 만들어낸다.” 이차원의 평면에서 삼차원의 입체를 통찰해내는 미수와 김병기의 추상언어 인식과 실천은 350여년의 시차에도 불구하고 동궤를 이룬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추상화 하면 소리를 색으로 바꾼 칸딘스키나 구성주의나 절대주의 거장 몬드리안이나 말레비치만을 기억할 뿐이다. 우리는 한국미술역사에서 추상화의 유전인자를 찾아보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다. 이런 환경에서 당연히 서예와 추상은 무관하다. 로버트 머더웰이 증명하듯 필획이 모태인 추상표현주의는 한국미술이 오히려 역으로 꾸어다 쓴다. 그러니 한국의 추상미술 역사는 잘해야 70여년밖에 안 되는 것으로 계산된다. 이것은 전적으로 ‘서예는 미술도 예술도 아니다’라는 식민지시대 일본화된 서구 미술잣대 탓이다. 추상의 골수인 서예는 ‘서화에서 미술로의 전이’라는 한국 근대미술의 프레임에 갇혀 지금까지 말문이 막혀있다.
‘서화에서 서화미술로의 도약’으로 언로를 트면 미수체는 한국 현대미술의 역사가 되고 미래가 된다. 특히 웅연 석문이 ‘기화(氣化)’로 이루어진 귀신의 필적이라는 지점에 가서는 가상공간이 판치는 사이버시대 추상의 본모습이 바로 이곳임을 목도한다. 화학에서 기화는 액체가 기체가 되는 현상이다. 이우형씨는 “한탄강변에 즐비한 35억년 전 선캄브리아기 변성퇴적암류의 각섬암(角閃岩; 빛이 나는 기하학적 구조의 돌), 즉 풍백·운사·우사가 담긴 돌이나 현무암의 깎아지른 절벽과 같은 웅연과 썩은소 바위야말로 미수 예술의 철학과 실천의 원천”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공룡 발자국처럼 푹푹 팬 미수체의 대담한 낙필(落筆)은 비바람의 기운을 형상화한 귀신의 발자국 형태와 다르지 않다.
서구추상이 귀로 듣는 음악을 눈으로 보는 미술로 바꾼 것이라면 미수체는 한 단계 더 들어가 시각과 청각의 근저에 있는 신기(神氣)를 골·육·혈의 필획으로 드러낸 것이다. 천지자연의 기운과 미수의 몸이 혼연일체가 된 ‘씀’이라는 행위의 결정이다. 이 지점에서는 그림과 글씨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서화동원(書畵同源)인 미수체의 귀신과 같은 필적이야말로 기화의 고갱이다. 그래서 연천의 자연이 배태한 미수체의 미학은 하우전(夏禹篆)의 자기화를 넘어 숙신 땅의 돌칼, 후기구석기 주먹도끼, 선캄브리아기 암석의 기운들이 시루떡과 같이 축적된 다층구조를 이룬다. 가상과 실상이 일상이 된 새로운 신화시대가 오늘이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시대에 예술의 과녁은 서예가 되고, 그 관건이 기(氣)의 형상화일 때 미수체는 과거지사가 아니라 예술의 미래가 된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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