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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와 해방정국만 해도 ‘나는 쓴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사실이었다. 김구와 이승만의 경우 만나는 사람마다 휘호를 해주었고, 글씨 그대로 실천되었다. 하지만 우리 시대는 글씨와 정치가 따로 논다. 휘호정치가 사라지면서 생생한 현장의 이야기가 담긴 고격의 글씨도 정치도 죽었다.

그렇다면 글씨도 살고 정치도 사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글씨가 정치가 되고 정치가 글씨가 되는 곳에 있다. 양평 몽양기념관에서 지금 열리고 있는 <몽양을 잇다 - 몽양의 눈빛> 특별전에서 만난 몽양 여운형(1886~1947)의 육필 ‘正觀邁進(정관매진)’은 독자성과 보편성을 두루 갖춘 ‘여운형주의’ 휘호정치의 진수다. 그의 좌우합작을 통한 남북통일이라는 정치사상과 행동, 그리고 기질이 글씨에 그대로 융화되어 나온 결정체다. 외유내강의 군더더기 없는 팔다리와 같은 필획이다. 무한대로 팔을 벌린 ‘邁進’의 책받침 처리와 같은 공간경영에서 드러나는 포용력, 활달자재한 정신경계가 마치 몽양을 생면(生面)하는 기운마저 감돈다.

‘여운형주의’의 독자성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이정식 교수의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에서 “나 개인으로서의 주의는 맑스주의자요. 그러나 조선독립운동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적 행동을 한 것이오. 러시아에 레닌주의가 있는 것과 같이 중국에는 삼민주의가 있고, 조선에는 ‘여운형주의’를 가지고 하는 것이 조선해방의 길이라고 생각하오”라고 한 데에서 잘 드러난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의 현장에서 간파되는 ‘여운형주의’는 미국과 소련을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지정학상으로도 (한반도는) 남방세력이자 해양세력인 민주주의의 맹주인 미국, 북방세력이자 대륙세력인 사령탑 소련이 접합하고 있다. 때문에 자주국가 건설과 유지 발전은 조선의 역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좌우 협력에서만 가능하다”고 몽양은 통찰해낸다. 여기서 문명의 용광로인 한반도를 두고 그리는 ‘여운형주의’의 좌표가 좌우합작은 물론 대륙과 해양을 관통시켜내는 지점까지 고려하여 설정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몽양의 중도노선은 근로인민당 강령에서도 잘 드러난다. 민주주의국가 건설과 계획경제제도 확립, 진보적인 민족문화 건설과 전 인류의 문화 향상이 그것이다.

특히 철저한 기독교도인 몽양이 홍익인간을 좌우합작 통일의 발판으로 도약시켜내는 지점에서는 ‘여운형주의’의 본질이 빨간색만이 아니라 모든 색을 다 함유한 현지우현(玄之又玄)의 우주임을 그대로 보여준다. <몽양어록>에는 “하나는 한이니 한은 한울, 하늘을 가리키는 말이고, 둘은 들, 즉 대지(大地)를 뜻하는 말이며, 셋은 들에 뿌리는 씨앗에서 온 말일세… 좌우합작도 같은 맥락에서 생각해야 하네. 우리 민족은 원래 통이 크고 대동단결을 모토로 하여 살아온 민족, 정치란 바로 정(正)자의 정치여야만 하네. 옳게 하는 다스림이야 해”라고 토로하고 있다. 여기서 몽양의 ‘정관매진’의 속뜻도 제대로 이해될 뿐만 아니라 뼛속까지 혁명가가 몽양임을 확인한다.

아버지·할아버지가 골수 동학교도이고, 조상 대대로 노론과 대척점에 선 반골 소론 집안의 장손인 몽양은 1908년 아버지가 돌아가시자마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그대들을 다 해방한다. 지금부터 저마다 자유롭게 행동하라. 사람은 날 때부터 평등하다”고 선언한다. 하지만 몽양의 최후가 더욱 극적인 것은 몽양식 살신성인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반대파들이 다섯 번째 테러를 가했을 때 “나는 죽어도 이 길을 가겠다”고 하였고, 아버지를 걱정하는 자식들에게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라고 한 대로 서울 혜화동 로터리에서 반대파의 열두 번째 총탄에 끝내 암살되고 만다.

그 후 ‘여운형주의’의 추진체인 ‘정관매진’은 75년 동안 길을 잃고 있다. 남북분단에다 남남갈등이 극에 달한 지금, 몽양의 ‘정관매진’은 우리의 정관매진이 되었다. 하지만 누가 다시 정관매진을 쓸 것인가 생각하면 더욱 아득해지는 유월이다.

이동국 예술의전당 수석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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