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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중요하지는 않다고 생각하면서도 신경이 쓰이는 문제가 있다. 수개월째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에겐 그렇다. 대세와 무관한 잡음이라는 것을 알지만 지나치기도 어렵다. 최근에는 이들이 상전으로 모시는 미국의 현직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선거 결과에 불복종하고 있어 그에 전염될 것이 우려된다. 미국의 불복종 움직임에 고무될 여지가 다분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주말 서초동 법원 청사 앞 시위 현장에서 본 이들의 모습은 선거불복에 관한 한 ‘한·미 공조’를 넘어 ‘동조’가 되고 있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명수 대법원장, 권순일 전 중앙선관위원장 등을 한데 싸잡아 비판하는 것까지는 그런 일로 치부가 되었다. 그런데 이들의 주장은 그런 수준에서 멈추지 않는다. 지난 4·15 총선과 이번 미국 대선의 부정선거 과정이 쌍둥이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이들은 자기들이 4·15 때 당한 경험을 트럼프 측에 미리 알려줘 트럼프가 적시에 선거불복을 선언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트럼프 측으로부터 고맙다는 칭송까지 받았단다. 이들에게 미 민주당이 선거조작으로 트럼프를 떨어뜨렸다는 것은 이미 진실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서초동 한복판에서 “트럼프를 재선시키자”는 구호가 나오는 게 설명되지 않는다.
미국 언론들은 근거가 없는(baseless) 행위라고 하지만 트럼프의 선거불복종에는 그 나름 논리가 있다. 우편투표의 관리가 우리처럼 투명하고 철저하지 못해 의심이 제기될 여지가 있다. 전통적으로 해오던 선거관리 방식이 그렇기 때문이다. 실제 이번 투·개표 관리에서 일부 실수가 개입됐을 수 있다고 전문가들도 보고 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윌리엄 바 법무장관 등이 불복종 대열에 동참한 데는 이것이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선거 결과를 뒤엎을 가능성은 없지만 싸울 만한 최소한의 건더기는 있는 셈이다.
하지만 국내 불복종 세력의 주장에는 비슷한 논거조차 없다. 현재 전국적으로 120여건의 선거무효 또는 당선무효 소송을 제기해 놓고 있는데 아무런 근거와 논리가 없다. 이들은 조작된 투표지가 최소 100만장은 된다면서도 그 근거로 든다는 것이 왜 부재자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민주당 표가 많이 나왔느냐는 것이다. 조 바이든이 13만표를 얻는 동안 트럼프는 0표가 나왔다는 주장과 구조가 똑같다. 또 손팻말 중에는 ‘투표는 한국인이, 개표는 중국인이, 이게 나라냐’며 ‘차이나 게이트’라고 주장한다. 물론 증거는 없다. “선관위 직원들이 밤을 새워 야근했는데 그게 부정선거를 하느라고 그런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늦어지는 선거재판에 대해서도 대법원이 일부러 시간을 끌고 있다고 한다. 선관위 등이 증거를 없앨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연단에서 내뱉는 사람들은 변호사와 시민단체 대표들이다.
이들을 그대로 두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는데,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이들의 저돌성은 어떤 단체보다 강하다. 지난 4·15 선거 때 투표장에서 투표지를 빼내왔다. 구성원들도 녹록지 않다. 시위 현장에는 ‘육사○○기 구국동지회’니 ‘○○고교연합’이니 하는 깃발들이 다수 보였다. “깃발이 또 없느냐” “성우회(군 장성 모임) 차량 안에 많이 있다”는 말도 들렸다. 유튜브 채널에는 이들을 부추기는 가짜뉴스들로 가득하다. 제법 알려진 한 안보 분야 유튜브 채널은 미국의 투표용지 계표기인 도미니언 문제를 거론했다. 미 대선에서 선거 부정을 저지른 독일 전산업체의 서버를 미 특수부대가 급습했다는 것이다. 물론 일고의 가치도 없는 가짜뉴스다. 그런데 이 동영상을 하루 새에 20만명이 보았다. 또 다른 유튜브 채널에서도 선거 부정을 주장하는 가짜뉴스에 12만명이나 좋아요를 눌렀다. 같은 날 또 다른 단체도 미국의 선거 결과를 규탄하는 집회를 서초동에서 열었다.
선거불복종 세력의 폐해는 자신들의 주장을 배설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미국이 지금 그것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다. 시민의 선택권이 침해받고 있다. 1년4개월 뒤 치러지는 20대 대선은 어느 때보다 진보와 보수 진영 간 대결이 치열할 것이다. 선거불복종 세력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이들이 판을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 온전히 떠맡아 대책을 세워야 할 곳은 중앙선관위이다. 투표관리 전반의 투명성을 강화해 한 치의 의심조차 남겨선 안 된다. 법원도 계류 중인 선거재판을 신속히 진행해야 한다. 아무리 닥치면 해내는 능력이 뛰어난 한국인이라도 이 문제만은 미리 대비해야 한다.
이중근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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