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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임 닷새 만이었다. 지난 1월8일, 추미애 법무장관의 첫 인사는 빠르고 직선이었다. 대검의 윤석열 사단을 바로 겨누고 해체시켰다. 조국 수사로, 검찰개혁 착점이 달라 다섯 달째 앙앙불락해온 집권당과 서초동의 대치가 ‘추·윤 대전’으로 리셋된 날이다.
집요하고 팽팽했다. 어느덧 만추, 두 사람은 불구대천(不俱戴天)의 사이가 됐다. 추 장관은 7월 검·언 유착 사건에서, 10월 라임펀드·가족 의혹 사건에서 연거푸 윤 총장의 손발을 묶는 수사지휘 카드를 던졌다. 대검 감찰부엔 ‘기승전-윤석열’로 귀착될 감찰 지시를 쏟아냈다. 걸리면 징계하고, 끝을 보겠다는 ‘닥공’이었다. 윤 총장도 물러서지 않았다. 8월 신임검사 신고식에서 “민주주의 허울을 쓴 독재”라고 받아쳤고, 10월 국감에선 “수사지휘는 위법하고, 나는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라고 맞섰다. 두 사람의 눈빛과 언성에선 “살을 베이더라도 상대의 뼈를 치겠다”는 검객의 결기가 비친다. 멈추라는 총리 경고도 귓등으로 흘리는 모질고 긴 반목이다.
둘 다 바로세우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 검찰은 지금 만신창이다. 추 장관 아들 사건을 맡은 지검장이 ‘친추’라고, 월성1호기 강제수사에 나선 지검장이 ‘친윤’이라고 시끄럽더니 라임사건 수사 지검장은 “이래도 저래도 누가 믿겠냐”며 직을 던졌다. 끼리끼리 말 섞고, 어디서 누가 맡는지에 따라 수사도 억측·예단이 난무하는 최악의 몰골이 된 것이리라. 누구나 목맨다는 다음 임지, 그 인사가 공정할지 검사들은 묻고 고개를 젓고 있다. 라임사태 주범 김봉현의 옥중편지엔 계약서도 없이 1억원 받고 사건을 덮어주거나 검연(檢緣)으로 압수수색 정보를 빼준 몰래변론과 전관예우, 룸살롱 향응, 추석 떡값, 석 달간 66회나 검사 앞에 소환된 표적·먼지털이 수사 단서가 적혀 있다. 시시비비를 가리겠지만, 김학의(접대동영상)·홍만표(수임탈세)·김대현(부하갑질)에 무딘 칼을 들이민 ‘괴물 검찰’은 그대로였다. 이른 해넘이 모임에서 현직 검사가 스타카토로 끊어 말한 세 글자의 일상은 “동·네·북”, 네 글자는 “추·파·윤·파”, 다섯 글자는 “죽·겠·습·니·다”였다.
윤 총장은 3개의 선을 넘었다. 퇴임 후 봉사할 방법으로 ‘정치’를 열어뒀고, 4·15 총선 후 메신저를 보내 임기를 지키라 했다는 ‘대통령의 말’을 까발렸고, 감사원도 수사의뢰하지 않은 탈원전 ‘공약’에 칼을 들이댔다. 미래 선택지에 정치가 있다 하고, ‘7개월 전 생각이 달라졌냐’고 대통령 인사권을 공개적으로 압박한 검찰총장은 이제껏 없었다. 총장 임기제(2년)의 존립 이유를 스스로 무너뜨렸다. 정권 초에 ‘과거’를, 후반에 ‘현재’를 캐는 수사 사이클은 윤석열 검찰도 다를 바 없다. 적폐수사 지휘자로 좋았을 ‘검찰주의자 윤석열’은 검찰개혁 동반자로는 양날의 검이다. 살아 있는 권력 수사가 보호막이 되는 ‘한국 검찰의 역설’을 끊지 못한 4년차 국정이다.
덜컥수는 추 장관도 예외 없다. 윤 총장 쪽과 옥신각신하다 내놓은 ‘휴대폰 비번 공개법’엔 위헌 딱지가 붙었다. 인권수사를 외쳐온 법무수장의 자기부정이다. 비판 검사를 ‘좌표’ 찍고 대검 감찰부를 주머니돌처럼 부리는 것도 눈에 설다. 그가 가는 길은 황교안이 지나갔고, 또 누군가 갈 길이다. 잘못된 시스템과 관행은 인치(人治)의 그림자만 짙게 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1년 펴낸 <검찰을 생각한다>에서 “함께 통치하고 기득권을 지켜내는” 정·검 유착을 비판하고, 검찰정치는 사건을 창조할 수도 없게 만들 수도 있는 권력 독점에서 나온다고 짚었다. 취임사에선 “무소불위 권력 행사를 못하게 견제장치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 초심과 약속대로, 지금의 혼란을 정리할 수 있는 사람도 대통령이다. 결자해지는 ‘추·윤 대치’를 끝내는 것부터다. 대통령의 메시지는 법무·검찰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신뢰를 받고 있는지 심각히 묻는 것으로 족하다. 배가 잘못 가는 책임은 선장에게 물으면 되고, 배를 가라앉힐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가을 저잣거리 대화는 추·윤 논쟁으로 시작해 지겹다로 끝난다. 공수처가 출범하는 어디쯤이 적기일까. 정치와 관성만 보이는 윤석열의 시간, 독설과 피로가 쌓인 추미애의 시간은 닫힐 때가 됐다.
법(法)에는 물이 흘러가는 뜻이 담겼다. 만물을 이롭게 하고, 더러운 걸 씻어주며, 절벽은 용사처럼 뛰어내리지만 서로 다투지 않고, 낮은 곳에 머무는 노자 도덕경 속 ‘상선약수(上善若水)’의 그 물이다. 대한민국의 법은 추미애와 윤석열이 빠져야 다시 물처럼 흐를 수 있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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