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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

[인생+] 자기돌봄의 근육

opinionX 2022. 9. 1. 11:03

여름 한낮 강의실에는 십여 명의 자활근로자들이 앉아 있었다. 택배, 도시농업, 임가공, 빨래방, 반찬, 청소 등의 자활사업단에서 일하는 중장년 참여자들이었다. 대부분 ‘1인 가구’였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혼자 사는 1인 가구 중장년 참여자들이었다. 자활사업단은 기초생활 수급자에게 근로 기회를 제공하고 자립 기반을 마련하는 정책이다. 

어느 자활기관의 초대로 중장년을 대상으로 인문학 강의를 진행했다. 하지만 ‘자기돌봄’이라는 강의 주제는 만만치 않았다. 팬데믹 시절에도 불구하고 당당한 겸손함 혹은 겸손한 당당함의 태도를 유지하며 ‘자기 배려’의 기술을 잘 발휘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혼자 사는 1인 가구 중장년이라면 하루하루 일상에서 웃음 짓는 날이 적을 수 있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어쩌면 ‘웃음의 양극화’로 먼저 표출되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을 하던 차에 스웨덴 청소노동자 마이아 에켈뢰브(1918~1989)의 일기 <수없이 많은 바닥을 닦으며>(교유서가)를 읽었다. 1965년부터 1969년까지 쓴 일기를 모은 책이다. 이혼 후 혼자 다섯 남매를 키우며, 여성 청소노동자로 살았던 저자의 고민과 고뇌가 행간에 가득하다. 1970년 스웨덴의 한 출판사 공모전에 선정되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매일 살림 걱정을 하고, 청소는 조금의 가치도 인정받지 못하는데도 상상할 수 있는 가장 고된 일이라고 푸념하며, 시청 사회복지과를 ‘죄인의 의자’로 비유하며 복지 ‘수혜자’가 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한다. 여성, 청소, 노동(자)이라는 단어들에서 사회적 낙인을 연상하는 그대로의 모습이다. 

하지만 에켈뢰브의 일기는 고귀한 인간 정신의 한 모습을 보여주는 책이다. “나는 계속 일기를 쓴다. 내 삶이 다른 누군가의 관심을 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가끔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다면 삶은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특히 매일 글쓰는 행위야말로 누구도 함부로 침범하지 못하는 드높은 ‘긍지’를 부여한다는 점을 생생히 예증한다. 글쓰기는 저자에게 ‘자기돌봄’을 위한 탁월한 삶의 도구였던 셈이다. 또 있다. 그는 ‘소유병’을 질타하며 자기 바깥의 세상에 대해 호기심을 잃지 않고 스웨덴어와 역사 등을 꾸준히 공부한다. ‘살던 대로’ 살지 않으려는 고귀한 삶의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좋은 문학작품을 읽고, 판화가 케테 콜비츠, 아나키스트 크로폿킨, 철학자 러셀 등의 저작을 읽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버트런드 러셀을 읽어라. 그러면 생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의 일기를 보며, 자기돌봄을 실천할 줄 아는 사람은 꼭 타자돌봄을 실천하게 된다는 점을 깨닫는다. 이·팔 분쟁, 베트남전쟁 및 반전운동, 푸에블로호 사건과 한반도 위기 등에 대한 큰 관심을 일기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어쩌면 저자야말로 누구보다 튼튼한 ‘돌봄의 근육’을 가졌다고 감히 말할 수 있으리라. 여름 한낮, 어느 강의실에서 만난 자활근로자들 또한 저마다 자기돌봄의 근육을 더 단단히 만드는 시간이었으면 한다. 가을의 시간이 자기돌봄을 위한 충일한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고립은 정신적·신체적 안녕을 방해한다. 무연사회는 면역체계가 절대적으로 취약한 사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겠다’고 결심할 수 있는 삶의 지지대가 필요하다.

<고영직 문학평론가>

 

 

연재 | 인생+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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