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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즈버그가 사망했다. ‘악명 높은 RBG’가 향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작년 1월 ‘양승태와 긴즈버그’라는 칼럼을 통해 장수를 염원했건만, 차기 미국 대통령 취임을 불과 넉 달 남기고 영면에 들어간 것이다. 이로써 하나의 시대가 저물었다. 진보가 확산되고 이성과 설득이 세상을 바꾸던 시대가. 너무 아쉽다.

그렇다면 한국 상황은 어떠한가? 엉망이다. 우선 법원이 아직도 미몽(迷夢)에서 못 깨어났다. 사법농단 사태에 연루된 판사들에 대해 연거푸 무죄를 선고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증거와 팩트를 부정하고, 때로는 직권남용의 논리를 비틀고 있다. 과연 한국 법원은 이렇게 ‘제 식구 감싸기’를 하면 실추된 사법부의 권위가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급 법원만이 그런 것이 아니다. 제 식구 감싸기에 관한 한, 대법원의 판단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국정농단 사건에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심이 진행 중인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건을 보자.

이 파기환송심의 재판장인 정준영 부장판사는 뜬금없이 미국 연방양형기준상의 준법감시조직을 언급하면서 재판의 공정한 진행에 커다란 문제점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준법감시조직의 설치 여부가 재판 진행과는 무관하다는 취지로 말했지만, 나중에는 이를 번복하고 감경에 참작할 수 있다는 취지로 말을 바꿨다. 법리도 엉망이었다. 준법감시조직이 정상적으로 작동했는가는 기업주가 아니라 기업에 대한 벌금형을 결정할 때 참작하는 양형 요소에 불과하다. 더구나 이미 상법과 금융회사지배구조법에 따라 삼성물산 같은 비금융회사건, 삼성증권 같은 금융회사건 모두 준법감시인(또는 준법지원인)을 의무적으로 두고 그 활동의 독립성을 보장하도록 되어 있었다. 준법감시조직이 잘 돌아가지 않은 책임은 이 부회장이 궁극적으로 져야 한다. 그런데 무슨 옥상옥을 더 만들면 죄를 깎아 주겠다는 것인가?

당연히 특검이 반발하고 재판부에 대한 기피신청을 냈다. 동료 법관들로 구성된 서울고법은 아무 문제가 없다며 이 기피신청을 기각했다. 문제는 대법원이다. 재판부 기피신청 재항고 사건에서 대법원 2부(주심 노정희 대법관)는 “재항고인이 주장하는 사유만으로 법관이 불공평한 재판을 할 것이라는 의혹을 갖는 것은 합리적이라고 보기 어렵다”며 “원심 결정의 이유를 관련 법리에 비춰보면 원심의 판단에는 헌법·법률·명령 또는 규칙 위반의 잘못이 없다”고 밝혔다.

파기환송심은 유무죄를 다투는 재판이 아니라 양형을 다투는 재판이다. 그런데 그 핵심 쟁점인 양형과 관련해 재판장이 말을 번복했다. 그래도 의심하지 말라? 이게 대법원이 생각하는 합리성인가? 기업주에 대한 재판에서 기업에만 적용되는 감경 요소를 거론하는 것이 법리에 맞는 것인가? 더구나 이미 현행법에 의해 독립적인 활동을 보장해야 할 준법감시조직이 존재하는데 별도의 준법감시조직을 만들라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는 요구인가? 옥상옥 조직이 신설되면 법률에 의한 기존 준법감시조직의 독립성은 잘 보장될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납득할 수 없다.

대법원 2부가 이런 납득할 수 없는 판단을 한 날은 공교롭게도 긴즈버그가 세상을 떠난 9월18일이었다. 평생 “나는 반대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던 긴즈버그를 떠나보내자마자, 이런 어처구니없는 대법원 결정에 또다시 “나는 반대한다”는 말을 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안타깝다.

사법부만 진흙탕을 헤매고 있는 게 아니다. 추미애 법무장관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다. 특히 지난달 28일 서울동부지검 수사결과 발표는 ‘추 장관의 거짓말’이라는 새 논란을 야기했다. 추 장관이 이제까지의 발언과는 달리 자신의 보좌관에게 아들 휴가 처리와 관련해 문자메시지를 보낸 게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정치권은 이 사안을 국민에게 거짓말을 한 추 장관의 도덕성과 연관짓고 있으나 나는 여기서 그보다 더 위중한 범죄의 가능성을 느낀다. 추 장관의 직권남용 혐의다. 형법 제123조의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 성립한다. 하나씩 살펴보자.

우선, 추 장관은 사건 당시 국회의원이었다. 따라서 공무원이 맞다. 다음으로 국회의원이었던 추 장관이 보좌관에 대해 ‘직권’이 있었는가? 국회의원 보좌관은 ‘국회의원수당 등에 관한 법률’ 제9조 제1항에 따라 “국회의원의 입법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둔 보좌직원 중 하나로, 동법 별표 4에 따르면 4급 상당의 별정직 국가공무원이다. 국회의원과 그 보좌관 간의 관계를 살펴보면, 국회 규칙인 ‘국회의원윤리실천규범’ 제15조 제3항은 “국회의원은 그 보좌직원을 성실하게 지휘·감독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으며, 국가공무원법 제57조는 “공무원은 직무를 수행할 때 소속 상관의 직무상 명령에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 즉 국회의원은 보좌관에 대해 직권을 보유하고 있다.

다음으로 아들의 휴가 연장을 처리하는 것은 국회의원의 입법활동이 아니므로 이를 지시하는 것은 직권의 남용이고, 보좌관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보좌관은 실제로 그 의무 없는 일을 했고 그 결과를 보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형법 제123조의 직권남용죄가 성립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추 장관은 지난 9월1일 국회 예결위에서 박형수 의원의 질의에 대해 이런 상황이라면 일반적으로 직권남용죄가 성립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사법부는 정의를 다루는 곳이다. 법무부는 그 이름 자체가 영어로는 ‘정의부’이다. 그런데 목하 한국에서는 정의를 찾기 어렵다. 검찰개혁을 외치는 목소리는 높지만, 그 현실은 초라하기만 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추미애 장관을 경질해야 하고, 김명수 대법원장은 땅에 떨어진 사법부의 위상을 조금이라도 회복할 방도를 진심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전성인 홍익대 경제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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