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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액사건을 담당하던 판사 시절, 빌려준 돈을 되돌려받지 못했다는 원고의 주장과 그 돈 진즉에 갚았다는 피고의 주장이 맞서는 사건을 만났다. 차용증도 영수증도 없었고, 혹시 누군가에게 돈을 전해달라고 한 것 아닌가 물었지만 그런 것도 아니라고 했다. 생각하다 못해 객기를 부렸다. 그럼 두 사람 중 거짓말한 사람이 천벌을 받아도 좋으냐고 물었다. 원고가 급히 “네, 축원합니다”라고 말하면서 두 손 모아 절을 하고, 피고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족집게도사가 아닌 다음에야 판사 노릇 하기는 정말 어렵다. 판사는 거짓말에 지쳐 있다.

법조인들이 하는 우스갯소리로 재판은 거짓말대회라는 말이 있다. 사건의 양 당사자가 하는 말이 같으면 당초부터 재판을 할 이유가 없기는 하다. 또 행동과학이 밝혀낸 바로 사람의 기억은 선택적이고 기억의 저장과 재생 과정에서도 반드시 망각, 과장, 변형이 일어나게 되어 있다. 양심적인 사람들마저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예를 들어 선박끼리 충돌한 사건에서 대부분의 승객들은 상대 선박이 잘못하여 사고가 일어났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사건에 따라서는 한쪽 당사자가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한 경우도 있다.

법조인들이 공적인 자리에서 난처한 질문에 내놓는 답변 중에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가 가끔 등장한다. 2007년 청문회에서 삼성그룹의 임원과 자주 골프를 친 사실이 있느냐는 질문에 검찰총장 후보자는 기억이 안 난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1년에 골프를 몇 번 치느냐는 질문이 이어졌다. 후보자가 잘 모르겠다고 답하자, 질문을 하던 의원이 한 말은 “그런 기억력으로 어떻게 25년간 검사를 했느냐?”였다. 2009년에도 같은 의원이 다른 검찰총장 후보자에게 모 사업가와 함께 해외에 골프를 치러 나간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은 역시 “저랑 같이 간 기억은 없습니다”였다. 위증죄는 기억에 반하여 진술하는 행위다. 객관적으로 잘못된 진술도 기억에 어긋나지 않으면 위증죄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법률을 설 배우면 여기에 묘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임 부장판사와 탄핵 진실 공방
녹취록 나오자마자 “기억이…”
사법부 수장, 하루 만에 말 바꿔
어쨌든 본질은 ‘사법농단’이다

임성근 부장판사의 주장과 김명수 대법원장의 주장이 맞선 시점에서, 얼핏 법정에서 양 당사자 중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게 분명한 사건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증거가 없을 때 소송에서는 입증책임에 따라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지만, 판사는 오판 가능성 때문에 찜찜하다. 그래서 판사는 늘 거짓말을 들으면서도 거짓말쟁이를 싫어한다.

임 부장판사가 음성파일과 녹취록을 내놓았다. 그도 김 대법원장도 오랜 판사 생활에서 수없이 거짓말을 들었을 것이다. 녹음테이프나 녹취록이 법정에 증거로 제출되는 일도 드물지 않으니, 두 사람 중 누구는 거짓말이 탄로 날 위험을 감수했을 법하다. 그런데도 김 대법원장이 그런 주장을 한 것을 보면 그는 자기 해명대로 기억을 못했거나 아니면 설마 녹음이 되었을 리는 없다고 생각했을 듯싶다. 하필 법관들 사이에서 진실 공방이라니, 딱하다.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닉슨이 비난받은 가장 큰 이유는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점이다. 특별검사 아치볼드 콕스가 대통령 집무실의 녹음테이프 제출을 요구하자 닉슨은 이를 거부했다. 다급해진 닉슨이 콕스를 해임하고 나서 며칠 후 기자들 앞에서 한 말이 걸작이다.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 녹음테이프 제출명령 신청사건이 연방대법원으로 가서 제출 결정이 확정되자, 시사주간지 타임의 시사만화는 닉슨의 가상 발언을 말장난으로 그려냈다. “나는 콕스가 테이프를 내놓으라기에 그를 잘랐는데, 테이프를 내놓게 된 것은 바로 내가 그를 잘랐기 때문이다(I fired Cox because he wanted me to give up the tapes that I had to give up because I fired Cox).” 김 대법원장은 탄핵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로 사표를 수리하지 않았다가 바로 그 때문에 임 부장판사를 탄핵으로 내몬 셈이다.

사법부 수장이란 사람이 하루 만에 말을 뒤집으며 내놓은 기억 운운 해명은 검찰총장 후보자들의 답변을 연상시킨다. 닉슨의 불행은 그 정도의 판단력과 도덕성을 가진 인물이 제 분수를 넘어 지나치게 높은 자리에 오른 데서 시작됐다. 모 일간지 칼럼에서도 김 대법원장은 다시 봐도 대법원장감이 아니었다는 말이 나왔다. 비전도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그는 취임 후 사법개혁 과업에서는 성과를 못 내고 이상한 인사권 행사 등으로 비난받았다. 정작 문제는 김명수 개인의 자질 시비라기보다 사법농단 사건의 운명이다. 어째 되어가는 꼴이 점점 수상하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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