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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비행기가 괌의 공항 근처 산에 추락한 사고가 일어난 해는 1997년이다. 사고 원인은 악천후, 착륙유도시설의 설치 위치 이상, 공항의 활공각 유도장치 고장, 기장의 피로로 인한 판단착오 등이었다. 그런데 조종실에 있던 부기장과 항공기관사는 기장의 판단 착오를 바로잡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왜였을까? 서열의식 문화와 한국어의 공손표현이 문제를 일으켰다. 블랙박스에 담긴 대화를 보면, 사고 전 기장이 악천후 속에서도 비구름을 뚫고 나가면 활주로가 보이리라는 기대를 보이자, 부기장은 이렇게 말한다. “비가 더 오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 지역에서 말입니다.” 부기장이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말은 “이렇게 기상상태가 나쁜데 다른 대비책 없이 육안으로 공항에 접근하다니요. 비구름에서 빠져나오면 때맞춰 활주로가 보일 거라고 생각하시는가 본데, 아니면 어쩌시렵니까? 바깥은 캄캄하고, 비는 퍼붓고, 활공각 유도장치는 고장인데도요?”였을 것이다. 비행기가 구름을 빠져나온 후 아직도 공항까지 거리가 20마일이나 남은 것을 아는 항공기관사가 다시 기장에게 말한다. “기장님, (지금까지) 기상레이더가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그가 정작 하고 싶었던 말은 “이 어두운 밤에 비행기를 착륙시키면서 육안에만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였던 것으로 보인다. 추락 9초 전에야 두 사람으로부터 명확한 의사표시가 나온다. “착륙 취소”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 것이다. 기장이 복창했지만 사고를 막기엔 이미 늦었다.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 나오는 이야기다.

경영학 교수 헤이르트 호프스테더는 어느 사회의 문화가 구성원의 가치관에 미치는 영향과 그 가치관과 행동의 연관성을 설명하는 ‘문화차원이론’의 모델을 만들면서 ‘권력거리지수(PDI)’를 이용했다. 권력거리지수는 ‘조직이나 집단의 권력을 적게 가진 계층에서 권력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정도’를 말한다. 2003년에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22개국 중 4위를 차지했다. 이 지수가 높다는 것은 조직 내에서 위계질서가 강하고 직위에 따른 권위를 내세우며 하급자는 상급자에게 쉽게 복종한다는 것을 뜻한다. 1988년에 심리학자 로버트 헬름라이히는 23개국의 비행기 조종사 1만5000명을 대상으로 조종사들끼리의 권력거리지수를 측정한 일이 있었다. 한국은 2위였다.

서열의식 외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우리말이 가지는 경어법과 공손법의 요소가 작용한다. 공손법은 문제 발생 시 완곡어법을 사용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직언 아닌 에둘러 말하기는 듣기에 좋지만 명확하고 단호한 의사표시가 필요한 상황에서 합리적 선택과 결정에 방해가 된다. 괌 사고 후 대한항공 부사장으로 부임한 데이비드 그린버그가 내놓은 해법 중 하나는 조종실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도록 규칙을 정한 것이었다. 1979년 이래 7건의 추락사고를 겪은 대한항공은 1999년 이후 추락사고를 내지 않았다.


경어체 판결문 나쁘진 않아도

의사소통·의사표시 명확성에

장애 될 여지는 있지 않을까

소송서류 평어체로 바꾸는 게

권위주의 시비 차단책일 수도


지난 4월 어느 판사가 판결문을 존댓말로 작성했다. 사법부가 지나치게 권위적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의견과 판결문의 권위가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맞섰다.

법령, 관보, 책, 논문, 신문기사는 모두 평어체를 쓴다. 그런데 이들 글의 독자는 불특정다수다. 독자가 특정되어 있는 경우의 글쓰기에서는 경어체를 쓰는 것이 보통이다. 공문서에 경어체와 평어체 중 어느 것을 써야 하는지에 관해서 법령에 특별한 규정이 있지는 않다. 국립국어원의 ‘한눈에 알아보는 공문서 바로 쓰기’나 ‘한눈에 알아보는 공공언어 바로 쓰기’에도 이에 관해 별다른 언급이 없다. 대법원이 내놓은 ‘판결서 작성방식에 관한 권장사항’도 같고, 예시된 판결문이 평어체로 되어 있는 것이 보일 뿐이다. 그러나 공문서에도 적어도 수신자가 특정인일 때에는 경어체를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국어학자 이정복은 <한국어 경어법의 기능과 사용 원리>에서 판결문 작성에서의 평어체는 관습화된 것일 뿐이며 이는 “법조계가 국민들 위에 군림하는 모습으로 보이는 점에서 개혁이 필요한 부분이다”라고 주장한다.

소송이라는 상황에서 진실로 중요한 것이 판사의 정확한 판단이고, 다시 이를 위해서 의사소통부터 바로잡혀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판결문의 경어체가 나쁘진 않아도 그것이 의사소통과 의사표시의 명확성에 장애가 될 여지는 있지 않을까. 나는 오히려 국민이 법원에 내는 소송서류를 평어체로 바꾸는 방안을 권하고 싶다. 그것이 일방적 경어 사용과 권위주의에 대한 시비를 없앨 수 있을 것이다.

<정인진 변호사·법무법인 바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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