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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무대 데뷔는 화려했다. 2년 전 평창 동계올림픽 특사로 방한한 그는 2박3일 체류기간 내내 웃음을 잃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과 식사를 하고, 경기를 관람하며, 공연을 보는 내내 그는 조금도 굽힘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은 당당하게 얘기했다. 청와대 방명록에는 ‘평양과 서울이 우리 겨레의 마음속에서 더 가까워지기를 기대한다’고 썼다. 그리고 문 대통령을 초청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했다. 얼마 뒤 남측 특사가 평양을 방문하고 몇차례 실무회담이 진행되더니 거짓말같이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후 남북관계는 방명록 문구처럼 큰 진전을 보였다.
지난 3월 그의 첫 대남 담화는 대반전이었다. 서울에서 보여준 경쾌하고 발랄한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검은 개가 더 요란하게 짓는다’ 등의 남측을 자극하는 표현이 쏟아졌다. 과연 그의 입에서 나왔을까 싶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6월 들어 제2, 제3, 제4의 담화가 잇따라 발표됐다. 불신과 혐오의 수위는 점점 올라갔다. 담화는 무례했을 뿐 아니라 상궤도 벗어났다. 어휘 하나하나가 ‘화염과 분노’의 말폭탄이었다. 적대적 담화는 ‘대적(對敵) 사업’ 선언으로 이어졌다. 곧바로 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됐다. 참다못한 청와대가 이례적으로 대북경고 성명을 냈다.
김여정 북한 노동당 제1부부장이 두 얼굴로 다가왔다. 야누스의 여인일까, 아니면 노련한 변검술일까. 김여정의 쏟아진 막말을 놓고 여러 해석이 제기된다. 직접적인 계기는 대북전단 살포로 인한 ‘최고 존엄’ 모욕을 들지만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코로나19 사태로 인한 경제난, 김여정의 2인자 굳히기 등을 원인으로 꼽기도 한다. 그러나 김여정의 ‘감염된 언어’는 사회주의 북한의 언어 정책·습관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언젠가 나는 소설가 이태준의 <신문장강화>를 보고서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감각적인 문장을 구사해온 이태준은 1940년 <문장강화>를 펴냈다. 고전이나 근대 소설에서 공들여 고른 예문을 보여주며 좋은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그런데 해방이 되자 이태준은 평양으로 가서 1949년 <문장강화>를 고쳐 <신문장강화>를 펴낸다. 모두 글쓰기 안내서이지만 차이가 크다. <문장강화>가 문장의 심미성과 표현 방식을 내세우고 있다면 <신문장강화>는 사회주의 노선과 이념을 실천하는 글쓰기를 강조한 게 특징이다. ‘지껄이면 말이요, 글씨로 써 놓으면 글이다’라는 북한식 어문일치를 강조한 것도 눈에 띈다. 개성을 중시한 스타일리스트 이태준이 어떻게 월북 3년 만에 체제 선전 작가로 표변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북한에는 노동당 산하에 정치적 선전·선동을 담당하는 전문작가 그룹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지도자의 대외 담화나 성명을 작성할 때 일부러 공격적인 언사를 동원한다. “배신자들과 쓰레기들이 저지른 죗값을 깨깨(몽땅) 받아내야 한다”(김여정 6·13 담화)는 구절이 그렇다. 북한에서 담화와 성명은 중요한 정치 수단이다. 그런 담화나 성명을 혐오, 저주의 막말로 도배한다는 건 쉬 납득하기 어렵지만, 언어를 정치도구화하는 사회주의의 속성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김여정의 담화문은 직접 작성한 게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녹아들어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 역시 언어를 정치도구화하고 이념화하는 북한정책에 감염돼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북한 권력을 이어받은 2012년 한 해 동안 발표한 담화문 4편이었다. 같은 분량의 담화를 김여정은 석 달 새에 쏟아냈다. 북한 권력 2인자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김여정의 막말은 북한 고위 지도자의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다. 일각에서는 김여정의 악역이 북한 권력 내부의 역할 분담이라는 분석도 있다. 그렇다고 그의 혐오·폭력의 언어가 용납될 수는 없다. 말과 글은 중요한 소통 수단이다. 그러나 언어가 정치에 종속되고 이념화되는 속에서 말과 글은 더 이상 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저주와 막말, 무례와 몰상식으로는 남북관계가 바로 서지 못한다.
70주년 6·25를 맞아 위기 국면으로 치닫던 한반도는 일단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엊그제 김정은 위원장이 대남 군사행동계획을 보류하지 않았다면 김여정의 말폭탄은 전단살포, 확성기 방송, 접경지역 군사훈련 등 도발로 이어질 뻔했다. 그래도 쏟아낸 막말은 주워담을 수 없다. 보류하거나 철회할 수도 없다. 혐오의 언어는 증오를 부르고, 증오는 폭력과 전쟁을 부른다. 담화든, 삐라든 평화와 공존을 저해하는 저주의 언어는 막아야 한다. ‘혀는 쉬지 않는 악’(성경 ‘야고보서’)이요, ‘입은 화를 부르는 근원’(명심보감)이기 때문이다.
<조운찬 논설위원 sido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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