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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어에서 정치(politics)는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Polis)에서 유래했다. 정치의 근간은 장소이며, 장소는 공간이고 지역이다. 20대 대선에서 다시금 지역주의가 강화됨으로써 정치의 장소성이 부각됐다. 유감스럽지만 지역과 정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대통령 선거 직후 주된 관심사는 언제나 인사문제였다. 누가 어떤 직책을 맡게 될지, 당선인이 누구를 발굴·발탁·중용할지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곤 했다. 이번엔 다르다. 20대 대선 이후 국민의 관심을 잡아끈 건 인사문제가 아니다. 뜻밖에도 장소, 즉 공간에 대한 관심이 그보다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청와대 밖으로 나와 국민 속으로 들어가 소통하겠다.” 윤석열 당선인의 공약이자 당선 제일성이었다. 인수위 대변인은 한발 더 나간다. “기존 청와대로 들어갈 가능성은 제로”라고 명토 박았다. 문재인 대통령 역시 유사한 공약을 했지만 경호와 안보 등의 이유로 포기하고 말았다. 대통령 집무실 이전 문제가 사람들 입길에 더 자주 오르내리는 이유가 그것일지도 모른다. 문재인 대통령이 못한 것을 윤석열 당선인은 할 수 있을지가 관심인 것이다.
정작 중요한 문제는 그게 아니다. 어느덧 집무실 이전문제는 여야 간 정치공방으로 비화했다. 광화문 정부서울청사를 거론할 때만 해도 그러려니 했다. 급기야 용산 국방부 청사 주변으로 확정되면서 논란은 더욱 증폭되고 있다. 궁궐을 나와 요새로 들어간다거나 국민 속으로 들어가겠다더니 군대 속으로 들어가기로 한 것 아니냐는 비판이 나온다. 1조원 이상의 천문학적 이전 비용이 들 것이라는 추계도 있다.
이쯤 발상의 전환이 요구된다. 현재의 대통령 경호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한 채 집무실을 이전한다면 그곳이 어디가 됐든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현재의 청와대만큼 완벽한 경호 시스템을 갖추기란 난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안보와 관련해서도 마찬가지다. 기존 청와대의 인프라에 버금가는 시스템 구축은 난망하다. 그러나 경호와 안보는 기술적인 문제에 불과하다. 정작 중요한 것은 원칙이다. 이쯤 원점으로 돌아가 숙고할 필요가 있다.
애초 대통령 집무실 이전 공약의 핵심은 국민과의 소통 강화였다. 더불어 청와대라는 상징적인 공간을 오롯이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취지도 포함됐다. 소통이 문제라면 굳이 그 많은 비용을 들여 구축한 청와대의 제반 시스템을 팽개치고 또다시 천문학적 비용을 들여 새로운 집무실을 구축할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다. 소통은 대통령 의지의 문제이지 결코 장소나 공간의 문제가 아니다.
소통 강화와 함께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겠다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이룰 수 있는 방법이 없지 않다. 청와대를 전폭적으로 개방하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의 집무와 안보를 위한 최소한의 공간은 제외하고서다. 백악관에는 연중 관광객이 몰린다. 그렇지만 관광객들로 인해 대통령 집무에 차질이 빚어졌다는 얘기는 들어본 바 없다. 우리라고 못할 것 없지 싶다. 학생들은 청와대로 수학여행을 오고, 일반 국민은 산책을 나오고, 외국인 관광객의 필수 관광코스 청와대를 상상해 보자.
또 다른 서양어에서 정치(Politics)는 ‘국민의 피를 빨아먹는 진드기들’을 의미한다. 그리스어에서 poly는 ‘많은’을, ticks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작은 벌레’를 뜻한다. 두 단어를 합친 politics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진드기들’이 된다(마이클 돕스, <하우스 오브 카드>).
대통령 집무실 이전문제는 얼핏 장소의 정치, 정치의 장소성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국민의 동의와 사회적 합의 없이 일방적으로 진행한다면 자칫 ‘진드기 정치’로 비칠 수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어려움에 처한 국민이 많다. 집무실 이전에 드는 비용과 행정력을 국민의 고통을 덜어주는 데 쓰면 좋겠다. “바보야, 소통은 장소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잖아.”
최준영 책고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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