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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의 처지는 가상의 속옷 장인과 비슷하다고 나는 가끔 이야기한다. 죽지 않는 불멸의 속옷 장인을 상상해보자.

옛날에 왕후장상이 황금 속옷을 입던 시절이 있었다. 속옷 장인은 황금실로 짠 속옷에 보석 실로 부와 권력의 상징을 공들여 수놓았다. 온갖 화려한 기교를 구사했다. 속옷은 원래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아니지만, 황제와 교황은 단추를 살짝 풀어 가까운 부하에게는 황금 러닝의 황홀한 광채를 슬쩍 자랑하기도 했더랬다.

그러다가 왕후장상이 쫓겨났다. 새 시대에는 중산층도, 서민도 면으로 만든 속옷을 입었다. 불멸의 속옷 장인도 시대에 적응했다. 공장을 세워 속옷을 만들어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비슷한 속옷을 입는 시대였다. 물론 부자가 입는 속옷이 조금 비싸지만, 황금 속옷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속옷에 바라는 점도 옛날과 같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종이 속옷의 시대가 되었다. “몇백년 만에 장사가 안 되네. 이상한 일이다.” 불멸의 속옷 장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길을 걷다가, 사거리에서 나눠주는 종이 속옷을 받는다. 일회용 앞치마처럼 한번 걸치고 버리는 속옷이다. 빨래할 걱정도 없고 너무나 간편하다. 이 공짜 속옷에는 글로벌 대기업과 포털과 플랫폼의 광고가 찍혀있다. 이래서 사람들이 속옷을 돈 주고 사지 않았구나. 앞으로 어떻게 살까, 속옷 장인은 고민스럽다.

눈치채셨겠지만 예술 창작에 대한 거친 은유다. 비슷한 이야기를 칼럼에서 가끔 다루곤 했다. 옛날에는 율리우스 2세나 레오 10세 교황 같은 높으신 분이 미켈란젤로 같은 뛰어난 예술가를 후원했다. 프랑스혁명 이후에는 오노레 도미에 같은 삽화가가 출판물에 자기 작품을 인쇄하고 인기를 누렸다. 오늘날은 이른바 ‘스낵콘텐츠’라고 불리는 창작물이 인기다.

10년 전 내가 어느 대학 특강에서 한 이야기다. 그때만 해도 미래 이야기였다. ‘아무리 그래도 종이 속옷이 면으로 지은 속옷을 정말 몰아낼까?’ 강연을 하던 나도 사실 반신반의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나 당연한 현재의 일이다. 웹툰과 웹소설과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시대가 됐다. 이 와중에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되었다. NFT(대체불가토큰) 이야기다.

나는 궁금하다. NFT 시대의 속옷은 황금 속옷에 가까울까 아니면 면 속옷에 가까울까? 또는 종이 속옷의 변형된 형태일까? NFT는 한때의 유행일까, 새로운 예술품 거래 방식일까? 지금은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람들이 다시 창작물 사는 일에 지갑을 열기 시작한다는 사실이다. 창작자의 귀가 솔깃한 상황이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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