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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면 습관을 만든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기억하기 위해서다.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1주일 먹을 약을 책상 귀퉁이에 놓는다. ‘내가 약을 먹었나?’ 건망증은 노화의 자연스러운 증상이다. 생물학적으로는 20대 중반이면 벌써 노화가 시작되지만 40대 중반쯤 노안이 나타나야 노화를 실감한다. 그때쯤이면 기억력도 깜빡깜빡하게 마련이다.

습관, 그것은 고집이자 행동 패턴이다. 침대 맡에 약봉투를 놓아두는 노인에게 식사 후 편안하게 약을 드시라고 약봉투를 식탁 위로 옮겨 놓으면 성질을 낼 수도 있다. “내 물건은 내 자리에 놔두라니까!” 이메일·홈페이지 비밀번호를 3개월마다 바꾸라는 권고를 무시하는 것은 해킹에 대한 안전불감 탓이 아니라 자신의 기억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패턴이 엉키면 헷갈리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자신의 기억을 되짚어나가도 쉽게 답을 찾아내지 못한다. 그래서 생물학적으로 노인의 습관 만들기, 즉 패턴은 적응(생존) 방식이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 자신의 패턴 속에 갇히고, 그 안에 사는 것을 편안해한다.

하지만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자신의 패턴 속을 맴도는 것은 생물학적 적응 방식일 수는 있을지 몰라도, 사회적으로는 고립의 원인이다. 사회에서의 고립은 도태를 의미한다. 세상은 쉴 새 없이 바뀌고 있는데 자신의 방식에 갇혀 있으면 소통이 점점 어려워진다. 남들처럼 날아가지는 못할망정 뚜벅 걸어나가려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는데, 자꾸 제자리에 앉아서 세상을 보려 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눈높이가 달라지지 않으니 시각도 바뀌지 않는다. 과거에 잡혀 있어 미래는커녕 현재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꼰대’라고 한다.

가끔 내게 묻는다. ‘나는 꼰대인가?’ 사회현상이 쉽게 납득되지 않을 때 동년배에게도 묻게 된다. “너는 이해 되냐?”

시대가 변하면 잣대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반대로 생각하면 꼰대들의 잣대는 과거에는 ‘통했던’ 것들이다. 

예를 들어보자. 예전엔 대의(大義)와 소의(少義)란 말들을 자주 했다. “네 말 뜻은 알겠는데, 지금 시국이 중대하니 대의를 따라야 하지 않겠냐!” 가치의 다양성은 인정하지만 시대적 과제를 앞세워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의는 별로 없었다. 민주주의 쟁취 같은 시대적 사명이 엄중했다.

기업에도 한때 ‘조직문화’ 바람이 불었다. 마치 회사원들을 한 몸의 유기체처럼 조직해 기업문화를 잘 만들면 경쟁력을 강화할 수 있다는 식의 이론이 유행했다. 이런 효율성 중심의 생각은 한국의 압축성장에 기여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안에 관계없이 조직우선이 원칙으로 변하면 문제가 생긴다. 동질성과 효율성만 요구하며 조직의 이름으로 다원적 가치를 외면할 때가 그렇다.  

2017년 박근혜 정부를 무너뜨린 촛불혁명은 시대가 완전히 변했음을 실감케 했다.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대규모 시위나 행사가 진행될 때에는 신문광고에 수많은 시민사회 명망가들의 이름이 올라왔다. 고문, 명예위원장, 집행위원…. 모든 시민사회단체가 연대를 통해 권력과 맞섰다. 촛불혁명은 특이했다. 민주묘총, 장수풍뎅이연구회가 등장했다. “박근혜는 하야하라, 고양이도 못 살겠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와 함께 진보해왔다. 조직과 권위는 자발적 개인과 유희로 대체됐다. 옳으냐, 그르냐의 차원을 넘어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이런 현상을 ‘제3세대 개인주의’라고 했다.

가끔 시대의 간극에 걸쳐 있는 아이러니를 본다. 자크 아탈리는 국경을 넘어선 이타주의, 인도주의 활동은 점점 커지고 있다고 했다. 한데 촛불혁명이 일어난 나라에서 가장 헌신해왔다고 인정받아온 시민사회단체들이 내·외부 비판으로 홍역을 앓았다.

“시민단체 자체가 늙어보인다. 시민단체가 제도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전통적인 정치관계의 일부가 됐기 때문이다.”(이졸데 카림, <나와 타자들>)

세상이 변하면 한 사회의 틀을 구성하는 도덕적 기준에도 변화가 있게 마련이다. 푸코는 <성의 역사 2>에서 도덕(모럴)과 윤리를 나눠 설명했다. 쉽게 말하면, 도덕은 사회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덕목이고, 윤리는 개인이 바른 삶을 구성하는 방식이다. 사회는 새로운 도덕을 요구한다. 물론 젊은이들의 생각에 무조건 동조하라는 말이 아니다. 능력주의가 공정의 잣대로 포장되는 것에도 반대한다. 유행에 뒤처지거나, ‘핫’한 것을 몰라도 상관 없다. 다만 사회적 사건에서 불거져나오는 다원적 가치는 숙고하며 자신의 윤리적 입장을 만들어야 한다. 로널드 드워킨은 ‘도덕적 원칙은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의무와 책임을 정의한다’고 했다. 

과거엔 역사, 전통, 문화를 내세워 반인권을 정당화하기도 했다. 초연결사회에서는 지역 장벽 뒤에 숨을 수 없다. 홍콩의 시위가 한국에 중계되고, 대륙 반대편의 코로나19가 실체적 문제가 된다. 탈영토, 리얼타임의 세계에서는 보고 듣고 말하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솔직히 변화를 따라가는 것은 버겁다. 동질성의 감소와 다원성의 증가는 꼰대에게 기분 좋은 일로 다가오지 않는다. 비록 꼰대라 할지라도 그의 과거는 민주주의 쟁취 등 승리의 역사다. 고통마저도 극복해내면 달콤한데, 승리의 과거는 더 달콤할 수밖에 없다. 역사의 주역으로 무대의 중심에 있던 그는 지금 무대의 끝자리로 내몰리고 있다. “나때는 말이야”는 더 이상 통하는 대사가 아니란 것도 안다. 하지만 찬이든, 반이든 시대의 가치를 담은 언어로 말하지 못하면 결국 사회적 무대에서 퇴장당할 수밖에 없으니 부단히 공부해야 한다.

<최병준 후마니타스연구소장·논설위원 bj@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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