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바람이 얼어붙은 땅을 녹인다. 겨우내 잠자던 씨앗은, 지금껏 자신을 감싸고 있던 두꺼운 껍데기를 벗어버린 씨앗은 연둣빛 싹을 내민다. 흙과 물과 햇빛의 도움으로 무럭무럭 자라난 새싹은 다시금 씨앗을 맺는다. 한 아이가 태어난다. 분홍색 잇몸에 앙증맞은 이가 자랄 무렵이 되면, 아이는 젖을 떼고 씨앗을 먹는다. 햇빛과 물과 흙이 빚어낸 씨앗은 그 자신이 그랬듯 아이를 자라게 한 뒤, 훌쩍 자란 몸에서 나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거름이 된 씨앗은 다시 다른 씨앗을, 세상 모든 씨앗을 키우는 양분이 된다. 씨앗이 품고 있던 물질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흩어지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고 다시 모여, 다른 씨앗으로, 다른 생명으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그렇게 세상만물은 모였다 흩어지면서 끊임없이 이어진다.
자연에서 연결은 가장 근본적인 원리지만,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은 파편적이다. 우리의 먹거리는 그 기원을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곡물은 깨끗하게 도정되어 밀봉되었기에, 어떤 식물의 씨앗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동물은 피 한 방울 남김없이 깨끗이 해체되어 각각의 부위와 무게에 따른 가격표를 붙인 채 붉은 등 아래 전시되고, 우리는 라벨에 적힌 안심과 등심, 갈비 등의 텍스트로 그들의 이전 모습을 유추해보지만 그조차도 쉽지 않다. 심지어 우리가 먹고 남긴 것들과도 우리는 분절되어 있다. 배설물은 변기로, 음식 찌꺼기는 쓰레기통과 싱크대 속으로 사라진다. 위생과 청결을 위해서는 이들을 빨리 제거하는 게 미덕이긴 하지만, 눈앞에서 치우는 것에만 집중하다 보니 이들이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인간은 그렇게 자연과 유리된 존재인 것처럼 사는 것에 익숙하다. 목이 잘린 동물들에 대한 터부와는 다르게 머리가 붙어 있는 치킨에 유독 거부감을 느끼는 건, 평소에 우리가 식탁 위의 먹거리와 그것의 원형 사이의 연결을 잊고 산 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완벽한 타자로 인식 땐 차별과 공격
혹자는 이런 순환의 고리를 알지 못해도 사는 데는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상이 무엇이든 나와 상관없다고 여길 때, 우리는 잔인해질 수 있다. 일부다처제를 이루는 동물 집단에서 새로이 우두머리 자리에 오른 알파 수컷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집단 내 암컷들이 키우는 젖먹이 새끼들을 물어죽이는 일이다. 우두머리만이 번식권을 가지는 집단의 특성상, 집단 내 이미 태어난 새끼들 중 새로 수장에 오른 수컷의 유전자를 받은 개체는 없다. 새로운 알파 수컷에게 있어 집단 내 젖먹이들은 자신의 핏줄도 아니면서 어미의 발정기를 중단시키는 방해물일 뿐이다. 이들은 자신과는 유전적 상관관계가 없기 때문에 마음놓고 도륙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타자화는 이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타자화는 단지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타인을 노예로 삼아 학대하고, 단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수백만명을 가스실로 보냈던 비극을 만들어냈다. 자신을 상대와 뚜렷이 분절된 존재로 규정하는 순간, 상대를 완벽한 타자로 인식하는 순간, 차별과 공격과 착취는 정당성을 얻게 된다. 나와 철저히 상관없는 타인이라면 내 이득을 위해 그가 가진 것을 빼앗거나 혹은 그가 착취당하는 것을 방관하게 된다. 하지만 상대가 나의 지인이라고 여겨진다면, 상대에 대한 공격성은 누그러들고 좀 더 나은 관계를 모색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연관성 인식하면 갈등 사라질 수도
진실은 인간이 스스로를 분절된 존재로 보는 인식과는 별개로, 우리는 대개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는 사실이다. 심지어 우리가 공고한 차이라고 느끼는 지역, 성별, 세대, 사회경제적 위치, 신체상의 특징 등의 조건은 사실 그다지 뚜렷한 타자화의 기준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이동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 살고 있으며, 장애를 가질 수도 이를 극복할 수도 있고, 나이든 이들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으며 젊은 세대도 언젠가 다음 세대와 마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성별은 뚜렷하게 나뉠지 몰라도, 이성이 없으면 우리는 더 이상 다음 세대로 이어갈 수 없기 때문에 이 또한 긴밀한 관계로 엮여 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우리 모두는 각자 다르고, 각자 뚜렷하게 분절된 그룹 속에서만 살고 있다고 여겨왔지만, 그 어떤 이들조차도 완벽하게 분절된 존재로 타자화시킬 수 없을 만큼 서로가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모두가 타인이라 믿었지만, 사실은 모두가 긴밀한 관계로 연결된 지인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관점의 변화만으로도 현재 우리를 괴롭히는 수많은 갈등의 상당수는 사라질 것이다.
이은희 과학저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