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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열여덟 살 무렵, 연암 박지원이 당대에 문장이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백탑, 곧 지금 종로에 있는 원각사 옛터 북쪽으로 박지원을 찾아간다. 박지원은 처음 보는 청년의 두 손을 맞잡으며 방으로 맞아들여, 자신이 지은 시문을 꺼내 보여주고는 손수 밥을 지어 대접하였다. 박제가는 이를 천고에 다시없는 환대라 기뻐하며 후에 <백탑청연집>의 서문에 이 이야기를 쓰면서 당대 실학파 학자들의 우정 어린 교제에 대한 글을 남겼다.

학생들과 <백탑청연집>의 서문을 번역문으로 읽은 뒤, 실학사상과 관련된 한자성어를 함께 공부한다. 그중 ‘실사구시(實事求是)’라는 한자성어는 추상적 공리공론이 아니라 ‘실제 속에서 합당한 이치를 찾는’ 학문적 태도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의 의미 자체가 추상적이어서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실사구시의 의미를 ‘실제적’으로 배울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데, 당장은 답이 떠오르지 않더라도 질문을 품고 있으면 어느 순간 또 다른 질문이 선물처럼 떠오른다.

나는 이 질문을 학습지에 담아서 학생들에게 나누어준다. 질문들은 모두 자기 자신을 향해 있다. ‘지금 나에게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 일에 대해 나에게 무엇이 중요하게 느껴지는가? 그것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효과적인 무엇이 있는가?’

학생들은 이 질문을 차례로 성찰하면서 사회 공동의 문제부터 개인의 특성, 진로, 학업, 가족, 친구 관계까지 수많은 층위에서 지금 자신이 뭘 느끼고 뭘 할 수 있는지 스스로 발견하게 된다. 이런 마음을 교실의 친구들과 나누다 보면, 서로가 새롭게 보이고, 대견하게 느껴지면서 학생들 사이에서 서로를 지지하고 응원하는 마음이 저절로 생겨난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동료애를 배우고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교사들이 이런 수업을 시도하는 것은 쉽지 않다. 가르침과 배움에 대한 지금의 정의는 교과서에 담아놓은 1년치 지식과 정보를 얼마큼 가르쳤고 얼마큼 암기했는지를 평가한다. 따라서 교사들은 학생들이 실제로 어떻게 배우는지 주의를 기울이지 못한 채 설명하기 바쁘고, 학생들은 그 의미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조건 외우기 바쁘다. 왜냐하면 빨리 ‘진도를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자신이 외우고 받아적은 것이 무슨 의미인지 되물으면 당황하며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왜 지식과 정보를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이 교육은 변하지 않는 것일까? 교과서의 지식은 전문가들이 잘 알아서 연구한 것이니 그것에 대해 학생들의 생각이나 느낌을 자꾸 물으면, 그 지식의 객관성이 훼손된다고 우려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자기 스스로 외부의 어떤 절대적인 지식의 권위에 순종하며 통제받기를 바라는 것일까?

교육이 달라지길 원한다면, 더 많은 이들이 이 질문을 함께 숙고해봐야 할 것이다. 이 질문에 우리가 어떤 답을 갖게 될지 모르지만, 우선 우리는 학생들에게 물어야 한다. 오늘 네가 외우고 받아적은 내용을 넌 어떤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세상과 네 자신의 삶에 어떻게 연관돼 있을지 조금이라도 물어봐야 한다. 그래야 학생들은 실제로 자신이 배우고 이해하고 있다는 기쁨과 용기를 얻을 수 있다.

조춘애 광명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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