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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문화와 삶

혁명은 어디에

opinionX 2020. 8. 13. 14:29

유독 추웠던 그 겨울, 그는 광장에서 풍찬노숙을 했다. 박근혜 정권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에 항의하기 위해 광화문에서 텐트를 치고 ‘거리의 가수’가 됐다. 혹독한 바람을 맞으며 밤을 지새웠다. 함께 노숙하는 이들을 위해 수시로 기타를 들고 노래도 했다. 2016년 11월4일 시작된 광장의 겨울, 머잖아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주말마다 100만명이 모이고 100만개의 촛불이 타올랐다. 광장의 찬바람 한복판에 선 그는 일련의 과정을 보며 생각했다. 이것이 혁명이라고. 감정은 글이 되고 노래가 됐다. 이 노래에 그는 ‘R!’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혁명을 뜻하는 ‘revolution’의 약자다.

이 노래는 2016년 겨울부터 해를 넘어 지속됐던 광장의 모습을 그대로 담고 있다. “서툰 말 한마디 주저하며 내민 손”으로 시작할 때, 그는 읊조리듯 저음으로 부른다. 노래가 진행됨에 따라 감정은 점층법으로 고조되고 마침내 그는 한껏 소리지른다. 두 글자 단어를. ‘혁명’이라고. 이전에 발표했던 일곱 장의 앨범에선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단어이자 주제였다. 2016년 촛불혁명의 시작 이전부터 끝을 지켜봐왔기에 쓸 수 있던 거대한 단어를, 손병휘는 자신의 여덟번째 앨범에 내세웠다.

전대협과 한총련의 시대, 그는 노래패 활동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투쟁의 현장이라면 어디든 빠지지 않고 무대에 섰다. 조국과 청춘, 노래마을 등 그 시절 집회현장을 기웃거리기만 했어도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들에 몸담았다. 현장의 ‘민중’들은 그의 선창에 맞춰 합창을 하고 손짓에 맞춰 주먹을 흔들었다. 하지만 ‘운동가’가 아닌 ‘음악가’로서의 그에겐 결핍이 있었다. 교회 밖의 찬송가와 제대 후의 군가와 마찬가지로 투쟁현장 바깥의 민중가요는 생명이 없었다. 목적이 아닌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2000년 데뷔 앨범 <속눈썹>을 시작으로, 노래패 소속이 아닌 솔로 활동을 시작했다. ‘민중’이 아닌 ‘대중’을 위한 음악을 시작했다. 그가 만들고 부르고 싶은 노래들을 녹음하고 발매했다. 차곡차곡 쌓인 앨범이 일곱이 되고 여덟이 되는 동안 대중의 사랑을 받은 적은 없다. 그를 찾는 곳은 대체로 전과 같았다. ‘민중’에서 ‘시민’으로, ‘운동권’에서 ‘진보단체’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많은 무명 가수들이 그러하듯, 들인 공에 비해 돌아오는 게 현저히 적으면 음악계를 떠나기 마련이다. 과거에 함몰되어 현재를 잊는다. 손병휘는 그러지 않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만든 여덟번째 앨범은 그의 이전 어떤 앨범보다 많은 힘이 들었다. 모던 록 밴드 허클베리핀의 이기용을 프로듀서로 기용했다. 이기용이 자처했다. 촛불의 광장에서 연주했던 두 진영, 민중 가수와 인디 음악가가 손을 잡고 함께 앨범을 만든 첫 사례다. 거리와 광장에서 싹튼 언어가 마음에서 숙성되어 현대의 사운드를 만났다. 손병휘의 힘있는 목소리와 성긴 멜로디가 허클베리핀의 편곡과 연주로 날것과 세련됨이 공존하는 음악으로 재탄생한다. 1990년대의 투쟁현장과 홍대앞 라이브클럽의 공집합을 담아낸다. CD로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희귀해진 시대에 맞지 않는 화려한 앨범 아트워크는 음반의 가치를 기억하는 이들을 위한 선물처럼 보인다.

이 앨범에는 총 아홉곡이 담겼다. ‘R!’로 문을 열고 ‘마지막 전사에게’로 문을 닫는다. 첫 곡이 광장의 중심에 있던 이의 감정적 고양감을 반영한다면 마지막 곡은 회한을 이야기한다. “우리의 깃발은 낡아 버렸고/ 구호는 빛바랬네.” 한 시대의 선봉에 섰던 이들이 아파트에 목숨을 거는 모습이 투영된다. 구세대를 몰아내고 주류를 차지했던 세대가 뒷세대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으려 버둥대고 있는 현실도 느껴진다. 2016년 겨울에서 시작해서 2020년 여름까지, 한국 사회 흐름의 단면이 이 포크 가수의 앨범 밑바닥에 흐른다. 4년 전의 광장이 40년 전처럼 느껴지는 다이내믹 코리아에서 이 앨범을 듣는다.

<김작가 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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