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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정의당 대표의 성추행 사건에서 피해자가 형사고소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납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것 같다. 이른바 ‘공동체적인 해결방식’으로 명명된 것이 문제일까? 정서적 유대감이 강한 전근대적인 공동체를 떠올리며 거부감을 갖는 것일까?

하지만 정의당이 취한 조치는 사실 반성폭력운동이나 인권운동의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발전해온 방식이다. 특정한 유형의 조직에서만 유효한 것도 아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향하는 모든 국가에서 보편적으로 발달해온 ‘조직 내 분쟁해결절차’에 해당하며, 조직 내에서 자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적 분쟁해결방법(ADR)의 일종이다. 다양한 문제에 적용될 수 있지만, 특히 조직 내 성희롱·성폭력 등 인권침해사건의 해결에 활용되어왔다. 낯선 개념 같지만 한국에서도 1990년대 이후 다양한 제도들이 발전해왔다. 지방자치단체에는 인권보호관, 교육청에는 학생인권옹호관, 대학에는 성희롱·성폭력센터 또는 인권센터가 설치되었고, 공공기관에는 성희롱고충담당자, 사업장에는 명예고용평등담당관을 지정하도록 법제화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런 기구들이 설치된 이유는 무엇보다도 사법의 한계 때문이다. 사법절차는 강제적이고 공식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도 만만치 않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든다는 문제 이외에도 소송 자체의 본질적 문제들을 간과할 수 있다. 소송은 기본적으로 양자택일적 결론을 내는 데 적합하며 당해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 주력한다.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거나 조직적인 차원에서 재발방지대책을 모색할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 가해자 개인에게 어떤 처분이 마땅한지를 판단하는 데 적합하다는 것이다. 특히 형사절차는 엄격한 절차와 충분한 입증이 있어야 유죄 선고가 가능하다. 무죄는 형사법적 관점에서 범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인데, 사회에서 무죄 판결은 ‘아무 문제 없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심지어 면죄부를 주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법절차에 의존하는 한 이러한 위험을 완전히 피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사법절차 일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성희롱·성폭력 등 인권침해 사건에서는 더욱 극명하게 드러난다. 특히 성폭력 피해자들은 수사과정, 재판과정에서 받은 고통을 호소하는 경우가 많다.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을 재생하여 집요한 심문에 응대해야 한다. 피해자친화적인 형사절차를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이 시도되어 왔지만, 사법절차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를 뛰어넘기에는 역부족이다.

정의당이 말한 ‘공동체적 해결’은
사법적 절차가 가진 한계를 넘어
‘피해자’가 신뢰하는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렇다고 사법절차가 불필요하다는 얘기가 아니다. 비사법적 절차가 아무리 잘 작동해도 사법절차는 매우 중요하다. 사법절차가 인권친화적으로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은 여전히 절박한 과제다. 다만 비사법적 절차가 더 적합한 경우가 있고, 이때 대안적인 선택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사법절차와 비사법절차가 적절히 업무를 분담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인권침해구제제도를 고민해온 여러 연구자와 실무자들은, 사법절차가 최후의 보루로 잘 자리 잡고 있어야 비사법절차도 사법절차를 배후 삼아 원활히 작동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에서 조직 내 분쟁해결제도들은 여전히 신뢰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왜 형사고소를 하지 않았냐”는 의혹이 제기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한국 사회의 여러 조직 가운데 신뢰할 만한 조직 내 분쟁해결절차를 갖춘 곳이 거의 없고, 조직 내 분쟁해결을 통해 문제가 해결된 경험을 해본 사람도 거의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제도 자체의 고유한 한계라기보다는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충분한 인적·물적 투자가 선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위를 한번 돌아보자. 인권침해 고충처리 절차가 잘 갖춰진 회사가 얼마나 있는가? 본인이 다니는 회사에 명예고용평등담당관이 누구고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명패만 그럴듯한 것이 아니라 충분한 인력과 예산으로 제 역할을 하는 지자체·교육청·대학 인권센터가 몇 곳이나 되는가? 우리 사회에서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가 주저 없이 피해구제를 호소할 수 있는 조직 내 분쟁해결제도를 갖춘 곳이 얼마나 되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피해자가 형사고소 대신 당내 젠더인권본부의 절차를 신뢰한 정의당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정의당 성폭력 사건 처리 절차는 ‘피해자가 신뢰할 수 있는 분쟁해결 절차를 갖추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진 것이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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