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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면 장마가 끝나기를 애타게 기다렸다

장마 끝 무렵 물오른 자두나무 가지에 매달린

이른 봄부터 여름까지의 비와 바람과 햇볕

연두와 노란빛이 빨강과 자줏빛으로

익어가는 여름이 마침내

커다란 소쿠리에 가득 담긴 날이면

들보 아래 대청마루가 환하게 밝아졌다

유독 눈물 많은 누이와 두 동생 그리고

나는 소쿠리에서 가장 탐스러운 여름 하나를

손에 쥐고 크게 베어 물었다

입안 가득 고인 침과 과즙이 뒤섞인

새콤 달콤 시큼함에 찌푸린 얼굴

그 여름 오후가 붉게 더 검붉게 익어가면

볼품없고 때깔 흐린 무른 여름 하나

가장 늦게 어머니 입가를 물들였다

 곽효환(1967~)

유난히 길었던 장마와 현재 진행형인 코로나19로 인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은 눅눅하다. 하루 일을 마치고 퇴근하려던 시인은 문득 창밖을 본다. 시 ‘해 질 무렵’에서 “그림자는 조금씩 길어지고/ 그리움은 조금씩 짙어지는”이라고 노래한 그 시간이다. 순간 시인은 장마 이후 “새콤 달콤 시큼함”에 얼굴 찡그리며 먹던 자두를 떠올린다. 다 익기 전에 따먹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겠지만 4남매 중 누군가는 몰래 따먹다 걸려 꾸중을 듣기도 했으리라.

더 이상 낮도 아니고 아직 밤도 아닌 시간, 들보 아래 대청마루에서 4남매가 옹기종기 앉아 “커다란 소쿠리에 가득 담긴” 자두를 포식한다. 맛있게 먹는 자식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어머니는 배가 부르다. 아이들이 다 먹고 난 다음 “볼품없고 때깔 흐린 무른” 자두 하나 입에 넣어도 행복하다. 그게 모성이다. 이제 부모의 자리를 물려받은 시인은 시장에 들러 자두 한 봉지 사 들고 귀가하겠지만 어릴 때 그 풍경도, 그 맛도 아니리라. 그래서 시인의 그리움은 더 애잔하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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