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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신 물이 다 눈물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

늦은 지하철 안에서 깊은 신음 소리가 들렸다. 휠체어에 앉은 남자가 포유류가 낼 수 있는 가장 깊은 소리로 신음하고 있었다. 경전 같은 소리였다. 절박하고 깊은… 태초의 소리였다. 삶을 관통한 어떤 소리가 있다면 저것일까. 일순 부끄러웠다. 나는 신음할 일이 없었거나 신음을 감추었거나. 신음 한번 제대로 못 냈거나… 그렇게 살았던 것이었다. 나는 완성이 아니었구나. 내게 절창은 없었다. 이제 내 삶을 뒤흔들지 않은 것들에게 붙여줄 이름은 없다. 내게 와서 나를 흔들지 않은 것들은 모두 무명이다. 나를 흔들지 않은 것들을 위해선 노래하지 않겠다. 적어도 이 생엔.
허연(1966~ )

늦은 시간, 지하철을 탄 시인은 자리에 앉아 눈을 감는다. 하루 치의 피곤이 몰려온다. 설핏 잠이 들었을 때, “포유류가 낼 수 있는 가장 깊은 신음 소리”에 눈을 뜬다. “휠체어에 앉은 남자”가 꺽꺽 울고 있다. ‘포유류’라는 말에선 새끼가 연상된다. 남자는 “삶을 관통”하는 듯한 지독한 통증을 참고 있다. 시인은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픈 듯한 남자에게 선뜻 구원의 손길을 내밀지 못한다.

시인은 남자의 신음에서 경전의 경건함과 깊은 절박함, “태초의 소리”를 포착하곤 부끄러워한다. 부끄러움은 남자를 위해 해줄 게 없다는 절망감에서 출발한다. 살면서 “신음할 일이 없었”다는 것은 너무 평탄한 삶에 대한 반성이고, “신음을 감추었”다는 것은 아픔을 참고 살았다는 것이고, “신음 한번 제대로 못 냈”다는 것은 억눌려 살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삶은 내 삶이 아니다. 저렇게 사람들 앞에서 흐느낄 수 있는, 흔들릴 수 있는 삶이 진짜다. 저 남자가 시인을 흔들 듯, 시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들어야 한다. 시도, 삶도 아파하며 완성된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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