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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근육을 잡느라 하루를 다 썼네 손아귀를 쥘수록 속도가 빨라졌네 빗방울에 공백이 있다면 그것은 위태로운 숨일 것이네 속도의 폭력 앞에 나는 무자비했네 얻어맞은 이마가 간지러웠네 간헐적인 평화였다는 셈이지 중력을 이기는 방식은 다양하네 그럴 땐 물구나무를 서거나 뉴턴을 유턴으로 잘못 읽어보기로 하네 사과나무가 내 위에서 머리를 털고 과육이 몸을 으깨는 상상을 하네 하필 딱따구리가 땅을 두드리네 딸을 잃은 날 추령터널 입구에 수천의 새가 날아와 내핵을 팠던 때가 있었네 새의 부리는 붉었었네 바닥에 입을 넣어 울음을 보냈네 새가 물고 가버린 날이 빗소리로 저미는 시간이네 찰나의 반대는 이단(異端)일세 아삭, 절대적인 소리가 나는 방향에서 딸의 좌표가 연결되는 중이네 물구나무를 서서 세상을 들어 올리는 내가 있네 빗줄기를 잡느라 손은 손톱자국으로 환했네 물집이 터졌으나 손금에는 물도 집도 없었네 단지 여름이 실존했네
김희준(1994~2020)
이 시는 빗길 교통사고의 순간을 묘사하고 있다. “유턴을 잘못”해 차가 전복되는 긴박한 상황, 시인은 슬로모션 영상 속에서 주인공처럼 스스로 사고 장면을 설명한다. “속도의 폭력”을 이기지 못해 숨은 위태롭지만 상황을 유쾌하게 받아들인다. 먼저 간 “딸의 좌표와 연결되는 중”은 죽음의 순간이다. “빗줄기를 잡”으며 “물도 집도” 없는 곳으로 떠나고 여름은 아직 남아 있다.
장맛비가 내리던 지난 7월24일 저녁, 유망한 젊은 시인이 교통사고로 먼 길을 떠났다. 예지(豫知) 같은 시를 남긴 시인은 더 먼저 세상을 떠난 한 시인에 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삶과 죽음은 손바닥과 손등의 관계, 소통과 부재의 관계, 벽과 그 벽을 통과하는 문의 관계, 동공과 눈꺼풀의 관계 같은 것이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때의 찰나가 어쩌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름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미 그것을 체득한 시인은 가장 따뜻한 잠에 일찍 들었다.” 시인은 떠나고 시는 남아 세상을 적시고 있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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