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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응어리가 구름을 밀고 간다

누구신가

발을 절며

멀어지고 더 멀어져

간신히 나를 빠져나온

슬픔이 나를 본다

눈썹이 떨고 있다

검은 새가 깃을 친다

마음이 바래어서 숨어있기 좋은 몸

지금은

그 안에 들일

네가 없는 저녁이다 이토록(1962~)

무언가 말 못할 사연으로 마음에 응어리가 깊다. ‘응어리’라는 말에선 오래 쌓인 감정이 화산처럼 폭발할 것만 같다. 나와 내 집안에 먹구름이 가득하다. 결국 견디지 못한 너는 “발을 절며” 멀리 떠난다. 같이 있을 땐 몰랐는데 난 자리가 공허하다. 오래 슬퍼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나를 돌아보니 폐인 같다. 내가 슬픔을 보고, “슬픔이 나”를 보고 있다.

한데 “검은 새가 깃을 친다”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헤어짐이 아닌 영원한 이별 같다. 너무 울어 눈물이 마르고, “눈썹이 떨”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떠나보내고 까맣게 탄 마음이 하얗게 바랬다. “숨어있기 좋은 몸”이라는 건 너는 떠났지만 나는 너를 영원히 보내지 않았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다. 내 몸에 나 대신 너를 들이고 싶지만, 너는 내 곁에 없다. 몸이 기억하는 것과 마음이 기억하는 것은 아침과 저녁만큼 다르다. 변함없는 햇빛만큼이나 지고지순한 사랑이다. 시조를 쓰는 이토록은 이성목 시인의 다른 이름이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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