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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김보라·2019)는 1990년대에 청소년기를 보낸 이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영화다. 주인공 은희와 실제 비슷한 또래인 나는, 극중 대다수의 장면에서 그가 느끼던 감정의 온도와 밀도를 오롯이 감지할 수 있었다. 특히 학원 한문 강사인 영지 선생님을 향한 선망이 그랬다. “선생님 퇴근하실 때까지만 여기 있어도 돼요?” 용기 내어 묻던, “선생님이 너무 좋아요” 하며 힘을 다해 끌어안던, 명작전집 가운데 선생님에게 선물할 책을 고르던, 그런 순간순간의 아이 감정이 손으로 만져지듯 전해졌다. 짐작건대 그 미소한 기억들은 흙더미 속에서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묻던 중2 여자아이를 훗날 이토록 반짝이는 영화의 감독으로 만들어주었을 테다. 생의 어느 시절 만났던 나의 영지 선생님들이 내게 그리 해주었듯이. 나 또한 누군가의 영지 선생님이 되길 그날 밤 잠자리에서 기도했다. 그리고 며칠 후, 수업 도중 어떤 일이 발생했다.
내가 지닌 결함으로 인해 도리어 타인의 빈틈을 세심하게 알아차리고 보듬을 수 있을 거라고, 그리하여 싱그러운 젊음의 틈새에 숨어든 몇 안 되는 그늘진 얼굴들을 누구보다 먼저 찾아내어 다독일 거라고 항상 생각해왔다. 그날 수업에서의 돌발 상황은, 저 다짐이 안전하고 적당한 사회적 테두리를 전제하고 있었음을 자각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테두리를 부수고 들어온 한 학생의 돌출행동과 거센 말에 나는 몹시 당황했고, 이내 화가 났으며, 종국엔 강의실에 들어가기가 두려워졌다. 그게 빈틈임을 알아차리고도 보듬지 못했다. 그늘을 보고도 다독일 마음을 더는 갖기가 어려웠다.
여러 날 동안 고민하다 다른 수업에서 그 학생을 가르치는 선배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교내행사 외의 자리에서 따로 길게 대화 나눠본 적 없었지만 이 일을 상의할 대상은 그분이라 여겨졌다.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가만히 끝까지 들은 후 그동안 힘들었겠다고 다독이지 않으셨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곧바로 조언하지도 않으셨다. 대신 그 학생을 그간 지켜보며 느껴온 바를 들려주셨다. ‘특별함’을 ‘부담스러움’으로 치부하며 치워버리곤 하는 지금 이 세상에서 우리 둘이라도 학생을 온전히 이해해보자 하셨다.
혹시 나의 교육자적 미숙함과 심약함을 질책하는 말씀인가 싶어 지레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자 “아니, 그건 이 교수가 그 학생을 잘못 보신 걸 거”라 단호히 반박하셨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선생 편을 들며 짐짓 동조해줄 법했지만 그리 하지 않으셨다. 후배 교수한테 어떤 직장 선배로 보이는지보다 학생의 상처를 들여다보고 귀 기울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 여기신 듯했다. 순간 생각했다. 그 학생에겐 이분이 바로 영지 선생님이구나. 내 편이 되어주시지 않아 서운한 마음 대신 깊숙한 데서 안도감이 솟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개 숙여 인사드렸다.
<벌새>에서 은희는 직감적으로 아는 듯했다. 주위 사람 가운데 영지 선생님한텐 마음 누일 수 있을 것임을. 살고 싶고 또 사랑받고 싶어서 아이는 선생님에게 매달렸다. ‘저 좀 봐주세요’ 하며. 어쩌면 그날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학생의 말과 행동은 내게 타전해온 ‘힘들어요’ ‘제 얘기를 들어주세요’라는 신호였을지 모르겠다. 당시 나는 감상만 앞선 채 뭐든 받아줄 듯한 제스처를 취했으나 막상 그럴 그릇은 갖추지 못했던 거였다. 그릇이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었던 스스로를 책망하진 않겠다. 그 학생에겐 그의 영지 선생님이 계시고, 나는 그분 앞에서 변명을 늘어놓거나 서운함을 토로하지 않고 감사한 마음만을 품었으니 우선 거기 희망을 두려 한다. 한때 은희였을 내가 누군가의 영지 선생님이 되어줄 만큼 준비된 미래 어느 시점에, 세상의 은희들이 이를 알아보고 주저 없이 다가올 수 있도록, 내면의 얼굴이 너무 때 묻지 않은 채 나이테를 더해가고 싶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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