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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를 자르느라 새 칼을 꺼내 썼는데, 며칠 후에야 그 칼날이 일부 부러져 있는 걸 발견했다. 고기를 자르던 날 딱 한번을 제외하고는 이후로 다시 쓰지 않았던 칼이다. 싱크대에서도, 마루에서도 부러진 칼날을 본 기억이 없었다. 칼을 보관하는 블록에도 당연히 없었다. 대체 그 칼날은 어디로 간 것일까, 불안은 며칠간 계속되었다. 내가 자른 고기 안에 숨어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이미 여러 날 닦고 훔친 마루 어딘가에 보란 듯이 여전히 남아 누군가를 벨 준비를 하려는 건 아닐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안을 어쩔 방법이 없어 결국은 칼을 버리기로 했다. 냉동된 것도 아니었는데, 고작 고기 한 덩어리를 써는 힘도 이기지 못한 칼을 어디에 쓰겠는가, 그런 이유를 붙였다. 그러면서 또 생각한다. 나를 힘들게 하는 건 찾지 못한 칼날에 대한 불안일까, 제 역할을 못한 칼에 대한 분노인가.

그러니까 이건 어쩌면 은유인데, 내가 고작 부러진 칼 하나에 이렇게 신경을 쏟고 있는 것은 사실 일상의 불안과 분노를 놓아둘 곳이 필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코로나19 사태가 길어지면서 사회 전체가 신경증을 앓는 것처럼 예민한 상태로 접어든 듯 보인다. 약자에 대한 폭력이 증가하고 있다는 뉴스가 방증처럼 쏟아지고 있다. 뉴스를 볼 때마다 때로는 내가 이유 없이 얻어맞은 피해자 같고, 때로는 내가 누군가를 무참히 때린 가해자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걷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문 시간, 인적이 드문 강변을 걷는다. 걸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가다듬는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데, 사실 최근 이어지는 뉴스 속보들은 아예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게 만든다. 세계 최대의 다크 웹 사이트 운영자는 1년6개월의 실형을 살고 풀려났다. 그를 통해 무엇을 더 수사하겠다는 건지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가 온 세계를 경악하게 한 그 범죄로 더 이상 처벌받지 않을 거라는 건 이해했다. 위력에 의한 성범죄로 수감 중인 정치인의 모친상을 둘러싼 논란도 듣는다. 그곳에 놓인 조화의 의미도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한 정치인의 자살을 속보로 들었다. 나는 그 자살의 이유에 대해 어떤 것도 납득할 수 없지만, 그 죽음이 우리 사회가 어렵게 개척해서 이뤄낸 어떤 성과를 어떻게 무위로 돌려놓았는지 알겠다. 그리고 그 죽음이 우리를 어떻게 분열시키는지도 보고 있다. 그 분열이 한편으로는 일종의 가면 벗기를 닮은 데가 있어서 애도 혹은 비판의 민낯을 통해 정치적 수사로 감춰왔던 어떤 이들의 진심을 늦게나마 깨달을 수 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래서 당신은 어느 쪽에 있다는 건가 묻는다면, 나는 다친 사람의 옆에 있겠다고만 대답하겠다.

나는 그 모든 소식을 길 위에서 들었다. 그래서 걷는 동안 연대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세상 어느 곳도 완전히 무흠하지 않을 때, 나는 어느 쪽 세상에 서서 걸어야 하는가. 한때 나는 연대란 팔을 내미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 연대는 그저 팔을 내미는 게 아니라 그 자리에 같이 서 있는 거라는 생각을 한다. 누구 한 사람 팔 내렸다고 겨우 백지장이 무너지는 일도 없고, 그래서 그 한 사람이 온 세상을 받쳐온 척할 이유도 없고, 나 없으면 네가 없고, 네가 없으면 내가 없는, 때로는 시혜가 권력이 그리고 협박이 되는 연대가 아니라 그 자리에 같이 서 있는 연대를 생각한다.

몇 주 전 코로나19 사태로 연기되었던 행사에 참가했다가 질문을 받았다. 그중 하나는 코로나 시대에 우리에게 어떤 위로가 필요한가 묻는 질문이었다. 나는 대답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위험한 일이 섣불리 위로를 구하는 일이라고. 그리고 또 말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은 우리 안의 분노를 멈추고 공격을 자제하는 일이 아닐까 싶다고. 그러나 그렇게 대답했을 때 내가 상상했던 분노는 이런 종류의 환멸 가득한 분노는 아직 아니었다.

<한지혜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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