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농업 정책 전문가들의 대담을 보다가 크게 모욕감을 느낀 적이 있다. 기후위기는 곧 식량위기임을 강조하며 그들은 농업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했다. “농업은 국민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할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농민이 중요하다 강조하는데 나는 왜 모욕감을 느꼈을까? 저 문장이 다른 표현들로 재생되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국가에 안정적으로 인구를 재생산할 의무가 있습니다. 노동자는 기업에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의무만 있고 권리는 없는 자들을 호명하는 목소리는 계속 이어졌다. ‘중요한 존재’라는 말은 그 존재를 누가 어떻게 불러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당신은 중요한 사람이야, 지금 너무나 중요한 일을 하고 있는 거야’라는 말은 강자가 약자를 항의도 못하게 굴복시킬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가스라이팅이 아니던가.
지금 농민은 기후위기 시대 식량 생산을 담당하는 중요한 존재고, 재생에너지 전환에도 막중한 책임을 가지며, 동시에 전환에 따른 부수적 피해도 감당해내야 하는 중요한 존재다. 그런 중요한 존재임에도 농민들은 요즘같이 우울하고 답답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재생에너지 전환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무분별한 농지 잠식과 농촌 난개발에 문제를 제기하는데 ‘재생에너지 혐오론자’로 불리며 전환의 걸림돌로 취급받는다. 에너지 전환이 가진 자들의 돈벌이 잔치가 되지 않도록 ‘정의로운 전환’을 말하는데 자꾸 주민 반발 입지갈등으로 문제를 축소하며 보상으로 해결하려 한다. ‘우리는 도시의 식량공급자가 아니다’ ‘농촌은 에너지 공급원이 아니다’라는 농민들의 구호는 농촌을 더 이상 식민화하지 말라는 외침이지만 지역갈등, 주민 이기주의로 쉽게 매도당한다. 전환의 주체가 되고 싶지만 늘 구제대상 원조대상으로 취급된다.
기후위기로 인해 발생하는 직접적인 위기보다 그런 시선들이 농촌과 농민의 삶을 더욱 위태롭게 한다. 최근에는 메탄 발생이 많다는 이유로 벼농사가 석탄 발전소만큼이나 해로운 온실가스배출 산업으로 지목되면서 많은 벼농사 농민들이 난감해하고 있다. 그 메탄 발생량이 어떤 조건과 방법에서 측정되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지만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는다. 전문가들은 자신도 잘 모르는 논물 얕게 대기나 중간에 논물 빼기 같은 방법을 대안이라고 내놓지만 그건 이미 일부는 해왔던 방식이기도 하고, 그에 수반되는 노동시간과 강도의 증가 등 다른 문제들은 다시 농민들 각자가 해결해야 한다. 생물다양성을 보존하는 논의 생태적 가치를 강조하던 시민들은 이제 ‘지구를 지키기 위해’ 주식을 밀과 보리로 바꾸자는 이야기를 한다. 식량위기가 기후위기 시대에 닥쳐올 가장 큰 위험이라고 경고하면서도 그 위험조차 도시 소비자들의 공급 문제와 식품 기업의 원재료 조달과 원가 문제로만 다뤄진다. 기업 손실액은 재빠르게 계산되고 지원책도 가장 먼저 나오지만 농민에게 닥친 위험에 대해선 제대로 된 조사도, 통계도, 대책도, 준비도 없다.
얼마 전 녹색당 정책대회에서 김정열 비아캄페시나 동남동아시아 국제조정위원은 ‘농민의 슬픔’에 대해 들려주었다. 지금 농민에게 가장 힘든 것은 생산량이나 소득 감소 이전에 농민에 대한 국가, 사회, 시민들의 외면이라고. 위기의 농민 옆에 아무도 있어주지 않는다는 것이 더 무서운 일이다.
대선을 앞두고 유력 후보들은 표심을 잡기 위한 온갖 선심성 공약과 정책들을 경쟁적으로 쏟아내지만 농민을 위한 후보는 어디에도 없다. 지금 농민에게 기후위기는 재난이고 기후위기 대응은 더 재난이다. 기후위기 시대의 농민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앞으로 어떤 위험이 더 닥쳐올 것이며,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을까? 매일 밥 먹고 사는 우리, 한번만 같이 생각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