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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명백한 진보 진영의 후퇴다. 민주당과 정의당 후보가 대거 낙선한 결과보다 진보의 크고 작은 텃밭에서 일찌감치 투표를 포기한 유권자가 많았다는 사실이 뼈아픈 패배다. 선거로 이기고 지는 일이야 정당의 상사다. 그러나 이번엔 상대가 잘해서 진 것도 아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부터 자중지란에 빠져 하나씩 둘씩 동지를 내쫓고 지지자를 내치다 보니, 애초에 누구를 어떻게 설득해야 이길 수 있을지 모른 채 받아든 결과라서 승패를 떠나 허망하다.

나는 진보를 지지했던 유권자의 얼굴에서 패배감보다 어두운 무감각함을 본다. 실패한 지도자를 보고 분노하지 않는 싸늘함에 민망함을 넘어서 두려움을 느낀다. 진보 진영의 정치인들은 ‘우리가 이 건만 잘 챙겼어도 이길 수 있었다’고 말하는 반사실적 반성조차 잊은 듯 행동한다. 아직도 남 탓이고 유권자 탓이다. 그를 보는 유권자는 도대체 누굴 탓해야 하나.

내가 보기에 실패는 오래전에 시작했다. 당인의 도덕 감정이 진보적 의제를 대체하고, 파당적 낙인찍기가 정책 토론을 방해한 지 어언 십년이다. 도덕적 판단으로 정치적 설득을 대체하는 정파란 일단 불길하다. 진보 진영 내에 ‘정치적 올바름’을 둘러싼 파열음은 불길한 수준을 넘어 정치적으로도 이미 그릇된 상태에 빠졌다.

툭하면 모욕이고, 혐오고, 불편하고, 참담하고, 환멸이고, 배반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진보 정치의 상투적인 표현을 보라. 이 말들은 정치적 설득은 꺼리고 정서적 파쟁을 일삼는 소위 진보의 품성을 보여준다. 우리 편을 만드는 능력은 없고 남의 편을 키우는 재주를 부리는 소위 진보의 솜씨를 보여준다.

진보 진영의 언어는 어느덧 부당거래, 이익편취, 권한남용, 불공정한 분배, 그리고 약자의 빼앗긴 권리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사회적 실패를 어떻게 발본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지 방책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일부 유권자의 정서와 믿음을 자신만이 진정으로 대변한다는 근거 없는 자만심을 내비칠 뿐이다. 심지어 이런 표현은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의 이익을 은밀하게 가로막기까지 한다.

차별금지법을 둘러싼 논쟁을 보자.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와 관련한 고용 및 재화용역의 공급에 있어서 차별을 금지하는 제도적 장치를 도입하자는 일은 오래된 진보 진영의 정치적 목표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노력이 20년이 돼가건만, 이른바 진보 정당들은 주요 선거를 앞둔 시점일수록 이에 대해 침묵한다. 평소 그렇게 차별과 혐오를 함께 묶어 외치다가도, 정작 가장 중요한 정치적 결전을 앞두고 정치적 의제로 삼아 추진하지 않는다.

나는 차별금지법안을 둘러싼 이해관계가 얼마나 복잡하고, 입법에 필요한 세부 조정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르는 바 아니다. 내가 불만인 것은 법안을 내고 성명을 발표하는 일만으로 일했다는 식으로 손을 놓는 그 자세에 있다. 이 법안에 반대하는 유권자는 물론 정책의 방향이나 효과에 대해 이견을 개진하는 동료마저 대화와 설득으로 포용하지 않는 그 무신경함에 있다. 예컨대 성별이나 나이 차별에 못 견디는 보수적 유권자를 정책 토론에 초청하지 않는다. 차별금지법이 추구하는 평등이란 사회적 성차나 시민권을 무시하는 평등일 수 없다고 믿는 진보적 유권자와 논의를 통해 조율하지 않는다.

차별금지법만 이런 게 아니다. 대학입시 개선, 부동산 안정, 실질적 다당제 도입,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사법제도의 개혁 등 대체로 마찬가지다. 원리를 내세워 총론만 말할 뿐, 정교하게 정책을 조절해 나가지 못한 채, 지지자를 소외시키고 터무니없이 많은 적을 만든다. 중요한 사안을 놓고 이익과 이념을 내세워 설득하지 못하는 정당은 담합체일 뿐이다. 이견을 용납하지 않고 내부 민주주의를 실현하지 못하는 정당은 패거리일 뿐이다. 두 번 지고도 왜 그랬는지 모르는 정당을 뭐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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