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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칼럼/세상읽기

생각의 틀

opinionX 2020. 9. 1. 10:26

감염병의 재확산 추세에 대응하다 보니 사회경제적 비용은 확대일로다. 사람 모이는 곳을 피하는 흐름으로 동네 상권이 위축되고 평범한 사람의 일상도 크게 변했다. 밤에 주문한 신선식품이 새벽이면 집에 도착하는 게 이젠 특별하지 않다. 그렇지 않아도 늘어나던 택배량이 더 크게 증가할 수밖에 없다. 내 택배가 어디쯤 있는지 실시간으로 온라인에서 훤히 볼 수 있는 건 기본이니, 우리나라의 택배산업이 언제 이렇게 발전했을까 싶다. 몇 해 전에 물류(物流) 전문가 한 분을 만났더니 국내의 대형 택배사들에서 사용하는 택배 추적관리 시스템은 미국 제품이라고 했다. 거의 그냥 가져다 쓰는 수준이어서 국내 상황에 맞춘 일부 커스터마이징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개탄했다. 수학자와 물류 전문가들이 협력하면 국산화할 수 있을 텐데….

택배 추적관리는 전형적인 최적화 문제에 기반해 있다. 어떤 택배들을 함께 묶어, 어떤 중간 지점들을 거쳐 보내면 시간과 비용이 최소화될지 계산하는 수학 문제다. 대부분의 물류 문제도 비슷하다. 미국의 온라인 판매회사인 아마존은 거대한 물류 창고를 여러 지역에 운영한다. 워낙 많은 상품을 다루다 보니, 무엇을 어디에 보관할지 잘 결정해야 한다. 일단 기존 고객들의 주문 패턴을 분석해서, 흔히 함께 주문하곤 하는 것들을 인접한 위치에 보관한다. 아기 기저귀를 주문하는 젊은 아빠가 캔맥주도 주문하는 일이 잦다라는 등의 예상치 못한 주문 패턴도 적용된다. 라이프스타일의 변화에 맞춰 주문 묶음이 변하니 보관 위치도 주기적으로 바뀐다. 물건 찾는 전체 동선을 최소로 줄이는 문제라서 고객 주문 빅데이터를 가지고 수학의 최적화 문제를 풀어야 한다.

물류 문제를 수학적으로 해결하기 시작한 근원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미국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했다. 당연히 병참 문제가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때 미국 수학자들이 선형계획법을 개발하여 이 문제를 해결했다. 최적화 문제를 미적분 안 쓰고 쉽게 해결하는 이론이었는데, 행렬 이론으로 체계화되었고 나중에 선형대수로 발전했다. 물류창고에서 선형계획법을 사용해 보관하면 한 가지 주문 때문에 창고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는 일이 줄어든다. 당연히 인건비뿐 아니라 배송 준비 시간도 줄어든다. 택배 관리도 마찬가지다. 실제 산업에서 나오는 최적화 문제는 선형계획법만으론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도 잦다. 이런 때는, 미적분과 조합론 등을 사용하는 높은 수준의 최적화 이론이 필요하다.

최근에 우리나라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빠진 행렬 이론은 제2차 세계대전의 승패라는 절박한 문제를 다루던 과정에서 출현했다. 17세기에 출현한 뉴턴의 미적분이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출현한 것도 다르지 않다. 우리가 초·중·고에서 배우는 수학 이론은, 맥락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인류에게 닥친 절박한 필요에서 나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적분학의 출현은 근대과학의 거대한 발전으로 이어졌다. 수치 예보를 통해 날씨를 예측하고 태풍의 진로를 예상할 수 있게 됐고, 인공위성의 궤도를 계산할 수 있게 됐다. 최적화 이론을 사용해 빅데이터를 다룰 수 있게 됐고, 기계학습과 딥러닝을 개발했다. 새로운 수학 이론의 출현으로 사고의 틀이 바뀌고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한계가 새로 정의됐다. 새 언어가 새로운 사고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요즘 중·고교에서의 수학교육도 사고의 틀을 제공하는 언어의 측면을 중히 여긴다. 이건 장래의 희망 직업과 무관하게 중요하다. 특정 분야의 학습 시기는 조절이 가능하지만, 사고의 틀 형성은 어린 시절을 넘기면 이미 늦어진다. 수학과 과학을, 원하는 아이들에게만 가르치자는 주장은 이래서 위험하다. 언어를 가르쳐야, 생각도 하고 소통도 할 것 아닌가.

<박형주 아주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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