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7년 12월 치러진 대선의 여야 후보 첫 TV토론은 일찌감치 그해 7월 말에 열렸다. 이때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의 슬로건이 압권이었다. ‘준비된 대통령.’ 여당인 신한국당의 이회창 후보에 비해 오랜 자신의 정치 경력과 경륜을 강조한 것이다. 앞서 김대중은 1971년 첫번째 도전한 대선에서는 ‘10년 세도 썩은 정치, 못 참겠다 갈아치자’를 내걸었다. 1956년 대선 당시 해공 신익희 후보(민주당)가 내걸어 큰 호응을 얻었던 ‘못살겠다! 갈아보자!’를 패러디한 것이었다.
‘준비된 대통령’은 이후 세번의 낙선 끝에 네번째 대선 도전에 나선 DJ의 상황과도 썩 어울렸다. 낙선을 통해 단련된 경륜으로 외환위기를 극복하겠다는 논리와도 맞아떨어졌다. 이는 후보의 면모와 강점을 잘 조합한 명슬로건으로 지금까지 종종 회자된다.
대선 슬로건은 간명하면서도 호소력 있게 후보를 부각시켜야 한다. 시대적 상황과 민심, 그리고 후보 이미지가 부합해야 승리의 키워드가 된다. 20대 대선 유력후보들의 슬로건이 계속 바뀌다 최근 확정된 데서도 이런 고심의 흔적이 보인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의 슬로건은 ‘이재명은 합니다’에서 ‘앞으로 제대로, 나를 위해 이재명’으로 바뀌었다가 결국 ‘위기에 강한, 유능한 경제 대통령’으로 정리됐다. ‘위기’ ‘유능’은 성남시장과 경기도지사를 지낸 이 후보의 경륜을 강조한 것이다. 검사로만 27년 재직한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와 대비시킨 것이기도 하다. 윤 후보의 슬로건은 ‘국민의 선택, 지금 바로 윤석열’에서 ‘국민이 키운 윤석열, 내일을 바꾸는 대통령’으로 바뀌었다. 정치권 밖인 검찰에 있던 윤 후보를 시민들이 호출했다는 점과 정권교체론을 부각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준석 당대표가 발표한 슬로건을 불과 수일 만에 바꿔 잡음이 일었다. 심상정 정의당 후보의 ‘주4일제 복지국가, 일하는 시민의 대통령’,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의 ‘바르고 깨끗한 과학경제강국’도 노동과 과학기술 분야에 정통하다는 점을 내세운 것이다.
대선 후보들은 오랜 고민 끝에 슬로건을 확정했을 것이다. 대선이 박빙의 승부로 가고 있다. 성패는 결국 슬로건이 대선의 시대정신을 관통하느냐에 따라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