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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톡홀름 기차역(왼쪽)과 영국의 ‘모두의 화장실’ 표지판 / 한국다양성연구소 제공

‘…혼자서도 첫날밤을 치른 사람처럼 행복할 수 있는 경이로운 곳, 그 어느 것도 몸에 지니지 못하는 한갓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겸손의 장소, 새 욕구 충족을 위해 불룩 나온 배를 비워내는 지혜의 장소….’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특정 장소를 이렇게 예찬했다. 인간의 경이로운 그 공간은 어디일까. 화장실이다.

동물인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잘 먹고 잘 싸는 일이다. 누구나 먹어야 하고, 또 싸야만 생존한다. 화장실은 인류의 탄생 이래 먹는 것만큼 소중한 배설의 장소다. 고대 바빌론·로마는 물론 우리나라 유적지에서도 화장실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발굴된다. 백제의 익산 왕궁리 유적 발굴 현장에서 본 화장실은 백제인들이 뒤처리를 어떻게 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생생했다.

인류 문명과 함께 진화하는 게 화장실이다. 화장실·배설물에 대한 인식·태도의 변화, 처리 방식의 변천 연구는 곧 인류 생활문화사 연구다. 한때 금기시되고, “뒷간”으로 불리며 소외됐지만 현대 아파트에선 잠자리와 가장 가깝다. 위생 개념이 부가되고, 그 개수는 부의 상징이다. 여전히 가장 사적이고 은밀하며 솔직한 곳인 화장실은 이제 기능성을 넘어 디자인의 대상이다.

성공회대 학생들이 국내 대학 처음으로 교내에 ‘모두의화장실’ 설치를 추진 중이다. ‘성중립화장실’이라고도 불리는 ‘모두의화장실’은 말 그대로 누구든 사용할 수 있는 화장실이다. 성별, 장애 여부, 성소수자, 어린아이부터 어르신들도 보호자와 함께 이용 가능하다. ‘남녀 공용화장실’을 넘어 한 공간에 변기와 세면대·장애인을 위한 손잡이 등 필요한 것들이 있다. 승객·식구들의 이용 제한이 없는 비행기나 집의 화장실과 비슷한 개념이다. 유럽, 백악관을 비롯한 미국, 일본 등에선 꽤 설치했다. 한국에서도 시민단체, 일부 공공기관에 마련돼 있다.

‘모두의화장실’은 기존 화장실에 대한 인식의 전환, 시대적 변화상을 반영한다. 화장실에 담긴 보이지 않는 구별과 차별을 넘어서자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지만 화장실은 문화의 소산으로 또 이렇게 진화한다. ‘화장실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라고 한 빅토르 위고의 통찰이 떠오른다.

도재기 논설위원


 

오피니언 여적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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