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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없고, 꼰대 같지만, 어쩔 수 없이 군대 시절 얘기다. 밤 9시40분쯤이면 취침 점호를 했다. 10시에 불을 끄고 자는 게 규칙이니까, 점호가 끝나면 잠깐 시간이 났다. 몰래 TV를 켜면, 으레 나오는 방송은 스포츠 뉴스였다. 그때 선임 병장은 태평양 돌핀스의 팬이었고, 마침 태평양은 그해 좋은 성적을 냈다. 이기는 날이 많아, 점호 직후 내무반(지금은 생활관) 분위기가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10시 전에 끝나는 스포츠 뉴스는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의식이었다. 우리 팀이 이겼나, 졌나를 확인하고, 위로 받거나, 분통 터지거나. 어쨌든, 하루의 끝.

그리고 모두들 잘 알겠지만, 2020년 지상파 3사에서 ‘스포츠 뉴스’는 없다. 메인 뉴스 뒤에 꼬리처럼 따라 붙고 끝이다. 독립 프로그램으로서의 스포츠 뉴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벌써 오래전의 결정이다. 물론 메인 뉴스의 시간도 더 이상 9시는 아니다.

사라진 것은 스포츠 뉴스만이 아니다. 대한민국의 유행어를 책임졌던 지상파의 코미디 프로그램도 모두 사라졌다. 워낙 웃기는 일이 많으니, 일부러 웃기는 것까지 볼 여유가 없다는, 자조 섞인 농담이 나왔다. 사람들은 더 이상 웃기는 프로그램을 보지 않아도 되는 걸까. 볼 필요가 없는 걸까. 이러다 야구도, 개콘도 사라지는 세상이 오는 걸까.

프로야구 한화는 5월23일부터 기나긴 연패에 들어갔다. 한 자릿수를 넘어 10연패를 지나면서 분위기는 더욱 가라앉았다. 연패가 더 늘고, 과거 기록을 바꾸면서 상황은 심각해졌다. 수많은 눈들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공을 잡다 놓친 내야수의 허탈한 표정 속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영락없이 댓글이 달렸다. “야 이 XX야, 웃음이 나오냐.”

결국 감독이 바뀌고, 선수들이 대거 1·2군으로 이동했다. 연패의 피로와 부담에 지친 고참들을 내리고, 비교적 어깨가 가벼운 어린 선수들로 분위기를 바꾸겠다는 계산이었다. 패배의 부담과 압박을 넘을 수 있는 건 거침없는 패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계산은 틀렸다. 몸을 날려 잡아내는 ‘인생 수비’를 했더라도 표정은 진지해야 한다는 걸 선수들은 바로 알아챘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갈라 치면, 어김없이 비난이 쏟아졌다. “야 이 XX야, 지금 웃음이 나오냐.”

패기는 금세 주눅으로 바뀌었다. 웃지 못하면, 어깨는 더 무거워진다. 어렵게 어렵게 18연패를 끝냈을 때, 끝내기 결승타를 친 무명의 유망주 노태형은 만세를 불렀지만, 홈을 밟은 주장 이용규는 한숨을 쉬었다. 웃음을 허락받지 못했다는 걸,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2020년 대한민국은 ‘웃음의 자격’이 존재한다. 웃을 때와 웃으면 안 되는 때를 구별하는 것은 ‘사회생활’의 기본으로 간주된다. 웃음의 T P O를 제대로 맞추지 못하면 실없거나, 미친X이 된다. ‘웃음의 갑질’도 존재한다. 사회적 위계에서 웃어도 되는 건 ‘갑’의 권리고, 을들은 그 웃음에 적극적 ‘리액션’을 해야 할 의무가 잔뜩이다.

이름도 찬란한 ‘아.재.개.그’의 시대. 이러니 웃음이 즐거울 리 없고, 개콘이 즐거울 리 없다. 그래서 다 사라졌구나 싶은, 마스크를 쓰고 과장된 눈웃음을 지어야 하는, 우울한 초여름.

<이용균 스포츠부 noda@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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