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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전단 살포에 대한 북한의 비난 수위는 과도해보인다. 민간 단체에서 북쪽을 향해 비방 전단을 날려보내는 일은 어느 정권에서나 있어왔다. 북한이 밝힌 대로 “지난해에도 10차례, 올해에는 3차례” 대북전단이 뿌려졌다. 물론 일부 전단에는 ‘핵 미치광 김정은 놈 때려부셔요’ ‘잔인한 살인독재자의 거짓 대화 공세에 속지 말자’ 같은 험악한 표현이 들어 있다. 이런 전단을 뿌리는 사람들은 북한 주민들에게 김정은 정권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대북전단이 실제 북한 주민들에게까지 들어갈 확률은 매우 낮고, 남측 지역에 떨어져 주민들이 수거해야 하는 오염원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럼에도 전단 살포는 북한을 매우 자극하는 행위다. 북한에서 ‘최고존엄’을 모욕하는 일은 용납될 수 없다. 노동신문은 전단 살포를 “총포사격 도발보다 더 엄중한 최악의 도발”이라고 했다. 2018년 4월 판문점선언에서 일체 중지하기로 한 적대 행위에 전단 살포가 포함된 이유다. 남북 정상이 합의한 만큼 정부는 대북전단 규제를 제도화하기 위한 후속 조치를 속도감 있게 이어갔어야 했다.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의 담화가 나온 지 4시간 만에 통일부가 입장을 내놓은 것을 두고 보수진영에선 정부가 저자세로 끌려다닌다고 비판하지만 이는 진실이 아니다. 합의문에 서명하고도 정부는 2년 넘도록 가시적 조치를 만들지 않았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면 애초부터 하지 말았어야 한다.

통일부는 판문점선언이 나온 이후부터 대북전단을 규제하기 위한 제도를 검토해왔다고 밝혔다. ‘표현의 자유’도 접경지역 주민 안전 등 다른 법익과의 균형 속에 보장돼야 한다고 부연 설명했다. 하지만 이미 타이밍은 늦었다. 북한은 대남 기조를 ‘대결과 단절’로 잡고 남측과의 모든 연락채널을 끊어버렸다.

남북관계 경색 국면에서 정부는 번번이 뒷북을 치고 있다. 하노이 노딜로 충격을 받은 북한은 남측을 향해 “오지랖 넓은 중재자 행세를 할 게 아니라 당사자가 돼달라”고 했다. 정부가 영변 핵시설을 중심으로 한 비핵화 해법을 미국이 수용하도록 설득해주고, 남북관계의 독자성을 확보해달라는 요구였다. 하지만 정부는 ‘선 북·미, 후 남북관계 기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대통령이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 재개방안을 언급했음에도 미국의 반대로 돌파구를 찾지 못했다. 북한의 금강산 남측 시설 철거 방침에 대해 정부가 반전 카드로 내놨던 개별관광 논의도 코로나19 상황에 막혀 중단됐다. 지금까지 보인 정부의 의지나 실력으로 볼 때 코로나19 변수가 없었더라도 성사되지 못했을 것이다. 대통령이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북·미 협상을 견인하겠다고 노선을 수정했지만, 이미 상황은 악화될 대로 악화된 뒤였다.

북한은 앞으로 남측을 적으로 대하겠다고 공언했다. 북한이 군사합의를 깨고 무력시위에 나설 것이라는 관측이 쏟아지고 있다. 김여정 제1부부장의 담화가 나오기 며칠 전 김연철 통일부 장관은 6·15 남북공동선언 20주년을 기념하는 온라인 이벤트에 참여해 직원들과 함께 평화통일을 염원하는 노래를 불렀다. 남북관계가 위기다. 이벤트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이주영 정치부 young78@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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