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말놀이 하나 해볼까 한다. 말을 배울 때, 격하고 짜릿한 것부터 입에 올린다. 골목에서 잘 놀다가도 투닥투닥 싸우는 건 흔한 일이었다. 혼자 분풀이하면서 등신이란 단어를 동원하여 속살거리고 나면 욕이 주는 후련함이 있었다. ‘저런 등신 같은 놈’을 한때 손안의 장난감처럼 입안에 데리고 다녔던 것이다.

김동리의 소설 <등신불>을 읽은 건 교과서에서였다. 경건함에 대한 동경은 있었지만 나라는 인간은 주인공과 너무나 결이 다르다는 건 그때 알아버렸다. 입시에 내몰렸던 기간, 이렇게 말씀하시는 선생님도 있었다. 연습장을 너희들 키만큼 등신같이 쓰라, 그러면 자신이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다.

그리 오래지 않은 전전전전 대통령 시절, 일본과의 마찰에서 그 어떤 대응을 두고 등신외교란 폄훼로 정치판이 시끄러웠다. 최근에는 외교참사, 굴욕외교 등의 말이 사태의 핵심을 찌른다. 옹알이 수준의 언어생활을 하는 것도 아닌 마당에 정직하게 공개된 말을 두고 어찌 이런 희한한 일이 벌어지는가. 이리도 적나라하게 들킨 사실에 대해 어쩌면 이렇게 환히 은폐했다고 여기는가. 이번은 그때의 그 말로도 모자라는 사태인 것 같다. 다 보았고, 다 들었고, 다 판단한다. 다 기억하고 마음속 돌멩이의 크기를 고르는 중이다. 부디 이런 오해는 말자. 뭉갰더니 다른 이슈가 덮쳐 뭉개지더군, 등신처럼.

지금 이 글에서는 읽기에 비속어인 듯한 단어가 섞여 있는바, 뜻이 서로 다르다. 한자로 쓰면 等神과 等身의 차이다. 한자책 저자의 약력 중에 더러 ‘저술등신’이란 표현이 있다. 함량 미달의 책이 아니라 자신의 키만큼 책을 썼다는 의미다. 학창시절부터 썼던 볼펜은 지금에 보아도 디자인이 참 건조해서 좋다. 미적분을 풀 때 더러 볼펜똥이 귀엽게 묻어나오기도 했던 나의 친구, 모나미. 최대최소값을 구하는 문제에서 날렵한 이차함수 그래프를 그리다 말고 연습장의 스프링 근처에 향긋한 똥을 찍어 바를 때, 내가 세상에서 중요한 일 하나를 해결하고 있구나, 수학의 난해한 고개를 넘어가고 있구나. 퍽 가소로운 궁리라도 했던가. 오늘도 수명이 다한 볼펜 하나를 사물함의 필기구총(塚)으로 보낸다. 남은 시간이 얼마일지 모르겠다만, 저술등신은 못해도 텅 빈 볼펜으로 무덤을 쌓을 수 있다면, 등신같이.

<이갑수 궁리출판 대표>

 

 

연재 | 이갑수의 일생의 일상 - 경향신문

16건의 관련기사 연재기사 구독하기 도움말 연재를 구독하시면 새로운 기사 정보를 알려드립니다. 2022.08.26 03:00 황당, 공포, 번민, 즐거움, 우울, 분노, 호의, 독기, 후회, 짜증, 냉혹, 회한, 자비,

www.khan.co.kr

 

댓글
최근에 올라온 글
«   2025/06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