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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표 4개 있는 펼침막은 처음 봤다. “왜! 민통선 주민을 죽음으로! 당장 행동을 멈추라! 하지 말라!” 대북전단 경계령이 떨어진 20일, 파주시 문산4거리에 걸린 격문은 단호하고 절박했다. 첫 목적지로 잡은 파평면 율곡습지공원에도 “주민들은 불안하다”고 호소하는 펼침막이 3개나 보였다. 폭풍전야였다. 풍선 띄울 만한 공터나 야산엔 경찰이 24시간 배치됐고, 임진각엔 순찰차가 계속 돌았다. 익어가는 청보리밭에서 사진 찍던 율곡공원의 50대 부부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고, 통일동산 앞 식당 주인은 “돼지열병과 코로나19로 고생하는 땅에서 웬 전단 소동이냐”고 역정을 냈다. 그래도 숨바꼭질은 진행 중이다. 지난달 31일 새벽 1시 김포 월곶마을에서 전단 풍선을 띄운 탈북단체들은 지난 8일 강화 석모도에서 쌀페트병을 바다로 보내려다 주민들에게 막힌 뒤 25일 전후로 전단 100만장을 보내겠다고 한 터다. 문산-파평-통일대교-임진각-탄현으로 이어 달린 파주 들판과 임진강엔 긴장이 서려 있었다. 주말엔 바람개비가 돌지 않았다. 탈북단체들이 바람 불길 원하는 24~26일엔 장맛비가 예보됐다. 하늘도 전단을 막고 있었다.
취재수첩을 들고 접경지를 찾은 게 세번째다. 1998년 6월16일. 처음 가본 통일대교 앞에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소떼를 끌고 북으로 향했다. 미 CNN 방송이 생중계하고 한반도에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 시작된 날이다. 그해 11월 금강산관광의 닻이 올랐다. 두 해 지나 평양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6·15선언에 서명했고, 몇달 뒤 개성공단은 첫 삽을 떴다. 한국전쟁 때 북한 탱크가 밀고 내려온 서부·중부(철원)·동부의 세 남침로 중에 동서쪽의 금강산·개성 길이 다시 뚫린 것이다. 평화는 그렇게 왔다.
공교롭게도, 22년 전 소떼가 방북했던 날이다. 개성공단 남북연락사무소가 주저앉았다. 화해의 전령이던 김여정과 평양냉면 주방장이 시작한 말폭탄도, ‘폭파’를 택한 것도 자극적이다. 인민군은 핫라인을 끊고 개성공단·금강산에 재주둔하겠다고 했다. 종전(終戰)을 서약한 2년 전의 4·27 판문점선언과 9·19 군사합의, 멀리는 2000년 6·15선언을 깨는 일방통고였다. 갈 때까지 가보자는 그곳은 ‘6·25의 겨울’이 50년째 지배했던 땅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내 취재수첩에도 1994년 판문점에서 북측 대표가 ‘서울 불바다’를 위협할 때 사재기가 일고, 1996년 무장공비 태운 잠수함이 강릉에 나타나고, 얼마 뒤 김정일 위원장 조카 이한영이 북에서 온 자객 총에 쓰러진 일이 적혀 있다. 달력 속에선 10칸의 거리. 6·25 70주년과 6·15 20주년은 오늘도 그렇게 엇가는 역사를 써가고 있다.
평화는 공기(空氣) 같다고 한다. 없어져 봐야 소중함을 곱씹기 때문일 게다. 그 평화·상생·통일의 여정을 DJ는 “피어오르는 무지개”라 했고, 노무현·문재인 대통령은 “구불구불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로 표현했다. 지난하지만 멈출 수 없다는 뜻이다. 2004년 금강산 옆 장전항에서 북쪽 판매원은 폭탄주를 부딪치다 “우리는 하나”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2011년 겨울 김포의 최전방 애기봉에서 만난 노부부는 “고향 땅(개성)이 저 앞인데 이젠 눈물조차 말랐다”고 했다. 작금의 삐라처럼, 남북이 크리스마스트리 점등 문제로 다툴 때였다. 86세가 됐을 그 할아버지는 살아계실까. 고향 갈 때까지 눈감을 수 없다던 할아버지는 귀에 들렸을 개성의 폭음 소리에 얼마나 낙담했을까. 꽃게·오징어잡이도 한창인 일촉즉발의 6월, 한반도엔 ‘게임 체인저’가 궁해지고 급해졌다. 소떼 방북과 평창 올림픽 특사처럼….
상념이 이어지던 차가 자유로에 올라섰다. 김연철 통일부 장관 사의를 대통령이 재가했다는 뉴스가 들렸다. 그 순간 어느 경제부처 장관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는 대통령 임기 5년간 장관은 정치인-관료-학자가 부처마다 세토막씩 돌아가도 좋겠다고 했다. 실무·조직을 잘 아는 ‘관료’가 지휘하고, 긴 안목과 아이디어가 있는 ‘학자’가 설계하고, 힘 있는 ‘정치인’이 현안과 예산을 밀어붙이면 싶었을 때가 있더라고 했다. 지금 통일부에 딱 맞는 말이다. ‘관료 조명균’이 한반도의 봄을 뒷받침하고, 하노이 노딜 후 꼬인 정세는 ‘학자 김연철’이 이어받았고, 이젠 정치인이 뒤엉킨 교착 상황을 풀어가면 어떨까 싶다. 그가 김여정과 만날 부총리여도 좋고, 2004년 통일부 장관이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이끈 ‘정동영 모델’일 수도 있다. 새길 것은 긴 호흡과 리셋, 강풍보다 햇볕이 한반도를 바꿨다는 6·15의 교훈이다.
<이기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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