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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는 과거시험에 아홉 번이나 1등으로 뽑혀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불렸다. ‘고시 다관왕’은 입신양명의 수단이지만 타인의 기회를 빼앗는 것이기도 하다. 율곡도 과거제의 폐단을 여러 번 지적했는데, 고급공무원을 고시과목 몇 개로 뽑는 채용제도는 문제가 많다. 선민의식을 불어넣어 조직이기주의를 조장하기도 한다.
윤석열 중앙지검장이 검찰총장 후보로 화려한 조명을 받을 때 그가 9수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점이 마음에 걸렸다. 9년의 청춘을 고시공부에 바친 사람이면 가치관이 편협하지 않을까, 출세와 권력 의지가 강해 보이는데 멸사봉공을 할 수 있을까, 보스 기질이 있다는데 사조직을 너무 챙기는 건 아닐까, 검찰개혁을 앞두고 있는데 검찰주의자는 아닐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그가 ‘가치관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꼽았을 때는 ‘수구정권에 맞는 검찰총장’이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평등 이념을 비판한 책이기 때문이다. 취임식에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본질을 지키는 데 형사 법집행 역량이 집중돼야 한다”며 전경련 회장처럼 말했을 때는 ‘잘못된 인사’라는 확신이 들었다. 한국을 극단적 양극 사회로 몰고 간 신자유주의를 맹신하는 인물이니 문재인 정권 개혁파와는 생리적으로 맞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한때 사회주의자였다”고 밝힌 조국 민정수석이 법무장관이 돼 검찰을 개혁한다고? 검찰주의자의 총수인 윤석열에게 조국은 제거해야 할 인물이었다.
윤석열이 박근혜 정권 때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고 말하자 진보 쪽에서 환호했지만, 충성의 대상은 국민이 아니라 검찰이었음이 드러났다. 국정감사에서는 “MB 때가 가장 쿨했다”고 말한 뒤 얼버무렸는데 그건 진심이었다. 통치 도구로서 권력을 휘두를 때가 전성기로 여겨질 수 있으니까. 공직자 인사 검증과 청문회는 ‘미스터트롯’을 뽑는 절차가 아니다. 후보자의 사생활이나 인기보다 공직을 맡았을 때 어떻게 기관을 운용하고 정책을 펼지 성향을 검증하는 게 중요한데, 그의 ‘수구본색’을 간파한 데는 없었다.
그는 자본시장이 허용하고 있는 사모펀드를 “사기꾼이나 하는 짓”이라며 “부부는 일심동체인데 민정수석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느냐”고 박상기 법무장관에게 강변했다. 그가 수사 결과로 말하겠다고 큰소리치던 ‘조국펀드’는 1심재판 결과로는 실체가 없었다.
그가 찍은 조국 일가족과 관련해서는 100차례쯤 압수수색을 하면서도 한동훈 검사와 채널A의 ‘검·언 유착’ 수사는 한사코 막았다. 윤석열 휘하 검찰은 그의 장모 관련 의혹은 물론 국회 선진화법 위반, 황교안 세월호 수사 방해, 나경원 자녀 입시 비리, 권성동 강원랜드 채용 비리, 김학의 별장 성접대 등 보수야당이나 ‘검찰가족’ 관련 의혹 앞에서는 관대하기 그지없었다. 그의 자의적 검찰권 행사는 역설적으로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누구보다 설득력 있게 증언했다.
보다 못한 추미애 법무장관이 수사지휘권을 행사하자, ‘검사장 회의’로 맞불을 놓아 여론전을 펴는 걸 보면 ‘노회한 정치꾼’의 면모가 겹친다. ‘검찰가족’ 원로들 의견을 듣는 것도 궁지에 몰린 정치인이 벌이는 짓과 비슷하다. 검사동일체 원칙이 정치적인 간부에게 복종하는 관행으로 굳어지면 ‘정치검찰’의 오명을 벗을 길이 없다. 검사들도 이젠 선민의식과 집단주의에서 벗어나 온전히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을 때가 됐다. 말 없는 다수 검사들 생각도 그러리라 믿는다.
이번 사태도 검찰이 수사권과 기소권을 다 갖고 있어 빚어졌다. 유무죄 여부는 법원이 결정할 일인데, 주로 ‘측근’으로 구성된 수사자문단이 수사·기소 단계에서 ‘판결’을 하려 했다. 애초 윤 총장도 한 검사와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대검 부장회의에 수사 지휘를 맡겼는데 사태가 불리하게 돌아가자 태도를 바꿨다. 윤 총장의 거취가 큰 관심사가 됐지만 깨끗이 사퇴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9수 만에 사시에 합격해 천신만고 끝에 올라간 자리니까. 그는 이미 정치를 시작했다.
<이봉수 세명대 저널리즘스쿨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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