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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볼턴의 회고록 <그것이 일어났던 방>은 동북아 정세 속에서 한국의 힘과 한계를 드러낸다. 지난 2년간의 북핵 담판은 코미디나 다름없었다. 물론 한국이 추진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평화 프로세스)의 성취를 깎아내릴 생각은 없다. 극한 대치 중인 북·미 최고지도자들을 설득해 사상 최초의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시키고, 북핵 담판을 성공 직전까지 끌고간 것은 분명 괄목할 성과다. 한반도 운명을 스스로 바꿔보겠다는 의지로 주변국을 움직인 드문 사례로 평가한다. 그러나 그 이면의 막장극은 처참하다. 한반도 평화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차기 대선 승리 기반용 ‘한 방’에만 정신이 팔려 충동적 행태를 반복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기대를 걸었다는 사실이 민망할 지경이다. 볼턴과 일본의 집요한 방해 공작과 한·미 간 이간질 역시 충격적이다.

지금 평화 프로세스는 표류하고 있다. 남북은 관계 악화로 자칫 ‘대결의 진지’ 속으로 복귀할지도 모른다. 대선 4개월을 앞둔 미국 역시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대로 가다가는 평화 프로세스는 동력을 잃고 좌초할 수도 있다. 왜 이렇게 됐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성찰이 필요하다.

‘하노이 실패’를 초래한 배후 세력은 북한을 불신하는 미국의 보수 관료와 의회, 군부다. 이들은 북핵 개발은 범죄이며 악이고, 이를 응징하는 행위는 정당하며 선이라는 기본 입장을 갖고 있다. 따라서 강한 압박과 제재를 통해 굴복시켜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니 대화·협상으로 비핵화와 제재 해제를 교환하는 평화 프로세스를 북한에 대한 면죄부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 일본 역시 강고한 반대세력이 존재한다. 아베 신조 총리를 필두로 하는 극우 보수들이다. 이들에게는 과거 냉전시대 공산 진영에 대한 봉쇄와 압박을 통해 정치 안정과 경제 발전을 동시에 이룬 ‘성공 체험’의 DNA가 내장돼 있다.

이 같은 평화 프로세스 방해세력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다. 이들의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또한 이들의 이해를 대표하는 지도자들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위험한 도박임을 북핵 담판 과정에서 목도한 바다. 오랫동안 우리를 옭아매온 ‘강대국 결정론’을 신봉하는 세력은 이들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한반도의 운명을 다른 나라에 맡겨 안전과 발전을 담보하지 못하는 시행착오를 더 이상 되풀이해선 안 된다. 평화 프로세스 자체가 주도적으로 한반도 문제를 풀어나가자는 취지 아닌가.

돌이켜 보면 평화 프로세스는 2018년 북한의 평창 동계올림픽 참가로부터 힘을 받기 시작했다. 북·미 정상회담도 남북 정상회담의 성과를 바탕으로 이뤄졌고, 북·미관계가 고비를 맞을 때마다 이를 되살린 것은 남북관계였다. 지금은 어떤가. ‘하노이 실패’ 이후 남북관계는 줄곧 내리막길을 걸었다. 교류는 전면 중단되고 급기야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마저 폭파되는 참극이 벌어졌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군사행동 보류 조치로 더 이상의 상황 악화는 막았지만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정세는 그대로다. 누가 이런 상황을 만들었나. 바로 남북이다. 북한은 남한의 남북합의 불이행을 비난하며 남쪽을 향한 문을 닫아걸었다. 남한은 첨단무기를 반입하고, 인도적 교류마저 제동을 거는 미국의 행태를 슬그머니 수용했다. ‘남북 간 적대행위 전면 금지’를 약속한 판문점선언과 9·19 군사합의는 흔들리고 있다. 주변국 탓을 할 입장이 안 된다.

남북 모두 2018년의 초심으로 돌아가는 게 맞다. 남북관계 회복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돌아보면 남북이 마음을 합치면 주변국이 다가오고, 대결하면 멀어졌다. 평화 프로세스를 극력 반대하던 일본마저 북핵 담판이 무르익자 태도를 바꿔 북·일 정상회담을 추진하지 않았는가. 한국은 북한과의 교류 재개에 지금보다 더 적극적으로 나가야 한다. 특히 미국이 대북제재를 내세워 남북관계 진전을 가로막는 ‘한·미 워킹 그룹’의 개편 방안을 미국과 긴밀히 협의해야 한다. 평화 프로세스도 실천방안을 제시하고 설득작업을 펴는 등 모멘텀을 살려나갈 필요가 있다.

북한의 전략적 공조는 필수다. 북한은 지금껏 입으로만 ‘우리민족끼리’ 구호를 외치면서도 정작 한반도 문제 논의는 미국에 더 의존해왔다. 더 이상 통미봉남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하기 바란다. 남북이 힘을 합쳐 반석 같은 관계가 만들어지면 미 대선 이후를 생산적으로 도모할 수 있다.

<조호연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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