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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엔 별 생각 없이 썼으나 어느새 숙고하며 쓰게 된 말들을 생각한다. 나에게 그런 말들 중 하나는 투병(鬪病)이다. 투병이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도록 도운 사람은 나의 친구 이다울이다.
이다울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작가다. 정확한 병명이 없는 고통과 증상을 수년 동안 경험해온 사람이기도 하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만성 통증과 우울증, 조울증 등의 기분 장애를 관찰하고 글로 쓰는 것은 이다울 작가의 주요한 작업 중 하나다.
그는 2018년부터 ‘등의 일기’라는 제목으로 자기 몸 안팎의 세계를 기록해왔다. 원인 모를 통증을 껴안은 채 침대에 등을 대고 누워 생각한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나는 그 기록 속의 문장들이 낯설고 소중하여 세상에 더 많이 알려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2년 전 그런 마음으로 ‘등의 일기’ 연재를 사람들에게 홍보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다울 작가가 투병 과정에 대한 글을 쓰고 있다고. 그러자 이다울 작가는 나의 표현을 부드럽고 확실하게 정정해주었다. 자신은 투병이 아니라 치병을 하고 있다고. 병과 싸우는 게 아니라 병을 다스리는 것에 가깝다고.
그가 ‘싸울 투(鬪)’ 대신 ‘다스릴 치(治)’를 써서 보여주었을 때 나는 부끄러웠다. 병을 대하는 방식을 함부로 단정했다는 것, 병과 관련된 나의 어휘와 상상력이 너무나 빈약했다는 것이 실감이 나서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이내 그보다 더 커다래진 감정은 감탄이었다. 더 많은 이야기를 품을 수 있는 ‘치병’이라는 단어가 놀랍고 감탄스러웠다. 병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여러 면모가 그 단어에 포함된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투병과 치병이라는 말을 소중히 아끼게 된다. 누군가가 고통과 맺고 있는 관계를 더 신중히 말하게 된다.
이다울 작가의 연재글은 차곡차곡 쌓여 지난 10월 책으로 출간되었다. <천장의 무늬>라는 제목의 책이다. 그 책의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침대에 등을 대고 누우면 이곳저곳 울퉁불퉁한 천장이 바라다 보인다. 천장 공사가 미흡한 탓에, 그곳에 달라붙은 벽지가 큰 굴곡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천장 벽지에는 희미하게 구불대는 작은 선들이 있고 가끔씩 작게 찢어진 부분이 있다. 나는 매일 그것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천장을 오래 들여다보는 날들이 늘어갈수록 불안의 크기가 커졌다. 아픈 몸이 불행에 관한 상상력을 크게 발동시켰던 것이다. 그래서 더 열심히 적었다. 내 등 뒤에 자리매김한, 이름 모를 끈덕지고 눅눅한 거대 괴물을 퇴치하는 마음이었다.”
<천장의 무늬>는 이다울 작가가 자신의 몸과 아픔이 납작해지는 것을 구해내기 위해 시도하는 책이다. 동시에 각자 고유한 아픔을 가진 타인들을 초대하는 책이다. 그 시도는 감각적이고도 지적이다. 용감하고 치열하다. 건강하지 않은 이들을 위한 언어를 풍부하게 갖추는 글쓰기다. 김하나 작가의 책 <말하기를 말하기>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흔히 ‘건강하세요’라는 말을 많이 한다. 상대가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하는 것은 나쁘지 않겠으나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거야’처럼 건강지상주의로 흐르는 말들은 질병을 앓는 사람들을 패배자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 그들의 삶과 이야기를 송두리째 납작하게 만들어버리는 표현이다.”
우리는 언어와 함께 축소되고 확장된다. 새로운 언어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등의 모습을 처음으로 조명하기도 한다. 온갖 아픔을 다스리는 이들에게 더 다양하고 정확한 말들을 건네고 싶다.
<이슬아 ‘일간 이슬아’ 발행인 글쓰기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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