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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이 없는 시대라고들 한다. 공통의 텍스트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호들갑을 떨 일은 아니다. 세상이 무너질 일도 아니다. 고전이 안 읽힌다 해서 영향 받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다. 다만 나 같은 창작자는 영향을 받는다.

20년 전에 내가 그린 만화를 손보고 있다. 오랜만에 만화책을 펴니 머리가 아프다. 이제는 옆으로 넘기는 출판만화가 아니라 위아래 스크롤하는 웹툰의 시대다. 내 만화책은 편집도 그림도 옛날 스타일이고 글씨도 너무 많다. 무엇보다 그때 내가 심어둔 우스개들이 지금 내 눈에 거슬린다. 그때는 시의적절한 풍자였고 내딴에는 재미도 있었는데, 지금 독자는 어느 지점에서 웃어야 할지 망설일 것 같다.

공통의 텍스트가 사라진다는 것은 패러디도 오마주도 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웃음보가 터지건 소름이 돋건 번뜩하는 짧은 순간에 반응이 나와야 한다. 장황한 해설이 변명처럼 붙어서야 독자가 재미를 느낄 틈이 없다.

한때 재미있었을지 모르나 지금 보면 ‘이게 뭐야’ 싶은 사례가 많다. <만정본 춘향가>에는 “쑥떡으로 왕을 하시다”라는 구절이 있다. 무슨 소릴까? “태고에 천황씨가 목덕(木德)으로 왕을 하시다”라는 <십구사략> 첫 문장의 패러디다. 이도령이 공부는 안 하고 딴짓을 한다는 우스운 장면이지만, 해설을 찾아 읽으면서까지 웃어주기란 쉽지 않다.

로렌스 스턴의 소설 <트리스트럼 샌디>에는 주인공의 수태 장면이 나온다. 이때 화자는 주인공의 인생을 “압 오보(ab ovo)부터 설명하겠다”고 한다. “호메로스는 압 오보, 즉 알에서부터 트로이아 전쟁을 이야기하지 않았다”는 <호라티우스 시학>을 패러디했다. 제우스가 백조로 변신해 레다를 유혹했고 레다가 알을 낳았으며 알에서 헬레네가 태어나 전쟁의 구실이 되었다는 신화 이야기다. 옛날 사람은 웃었겠지만 요즘 독자는 주석을 읽느라 바쁘다. 나는 <트리스트럼 샌디>의 어느 번역본에서 ‘압 오보’를 “레다의 난자로부터”라고 엉뚱하게 옮긴 것을 보고 웃음이 터진 일이 있는데, 나와 함께 웃어주기보다 나를 얄미워하실 분이 적지 않을 것 같다.

공통의 텍스트 없이는 독자를 웃기기도 울리기도 쉽지 않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두 가지 가능성을 상상한다. 하나는 개별 작품 대신 장르가 공통의 텍스트 노릇을 하는 것이다. 톨킨을 읽지 않아도 판타지 어법에 익숙한 작가와 독자가 많은 것처럼.

또 하나는 ‘밈’이다. 내가 오늘 당장 ‘춘향’ 이야기로 만화를 그려야 한다면 “쑥떡으로 왕을 하시다” 대신 “내가 고자라니”라고 이도령이 외치는 장면을 넣는 편이 낫다. “하지만 밈은 아는 사람만 알지 않느냐”고 되물을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고전 텍스트도 그러하다. 어쩌면 옛날에도 그 텍스트를 읽은 식자층 몇몇끼리 낄낄댔을 터이다. 고전이란 소수 엘리트를 위한 밈이었을까? ‘모든 이에게 사랑받는 창작물’의 꿈은 예나 지금이나 어려운 일이다.

김태권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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