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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담임을 했던 학생 중 선천적으로 한쪽 팔이 없는 아이가 있었다. 입학식 날 선우(가명)는 두꺼운 점퍼 안에 의수를 끼고 강당에 들어섰다. 불편하다고 안 하고 다녔는데 새 친구들을 만나려니 긴장이 되었는지 다시 의수를 찾더라고, 어머니가 귀띔해 주었다.

날이 풀리고 긴장도 풀리자 선우는 의수를 빼서 다른 한 손에 들고 다녔다. 정신없이 놀다가 어디다 뒀는지 몰라 “내 팔 봤어?” 하면 친구들이 함께 찾아줬다.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축구를 한다고 쌩하니 뛰쳐나가는 바람에 급기야 의수는 교실 창가, 운동장 벤치, 여기저기 나뒹굴다 눈에 띄는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어버렸다.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같이 샤워도 한다고 했다. 등을 밀어주고 서로 궁둥짝을 걷어차며 장난도 친다고 사감 선생님이 전해주었다. 선우의 학교생활을 걱정하던 나는 안도하는 한편, 그럼에도 혹시 모를 차별이나 놀림을 감시하느라 두 눈을 부릅떴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수업 자료를 찾는데 칸막이 너머로 선우와 다른 아이의 속닥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팔 하나면 불편하지 않냐?” ‘저렇게 무례한 질문을!’ 가슴이 철렁했다. 선우의 반응이 걱정되어 마음 졸이는 사이, 스스럼없는 답이 들려왔다. “대가리 달렸으면 생각을 해봐. 너 태어날 때 팔 세 개였다가 갑자기 두 개 되면 불편하겠지.” “응!” “근데 원래부터 두 개니까 안 불편하지.” “응!” “나도 그래. 빙신아.” “하긴 저번에 PC방에서 게임할 때 너한테 발렸잖아. 한 손으로도 졸라 빠르더라.”

대화를 들으며 알아차렸다. 친구들에게 선우의 신체적 특징은 장애, 비장애로 구분하는 영역이 아니었다. 그냥 ‘존재 그 자체’로의 선우였던 거다. 오히려 편견에 갇힌 건 나였다. 장애학생 담임으로서의 책임감에 주먹을 불끈 쥐고, 보호주의 관점에서 그들을 ‘도와야 하는 존재’로 인식했다.

장애란 무엇인가. 장애가 어려움을 뜻하는 거라면, 우리 모두의 삶은 어려움에 수시로 걸려 넘어진다. 장애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거라면, 우리는 한시도 다른 이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의존적 존재들이다.

선우의 특징을 ‘유별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던 아이들이 떠오르며, 이른 나이에 생을 끝낸 변모 하사의 소식이 더욱 애달프다. 사회는 그의 특징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성소수자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그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주지 못했다.

인권교육을 할 때 흔히 ‘차별’하지 않기 위해 ‘차이’를 인정하자고 한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르다’는 말도 강조한다. 얼핏 옳은 말들이지만, 자꾸만 차이를 부각시키는 교육은 계층을 만들고 분리와 배제를 양산한다. 차이에 유독 민감한 한국사회에선 다수 속에서 소수를 구분해내려는 심리가 습관적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찾아내야 할 것은 ‘다름’이 아니라 존엄한 존재로서의 ‘동질성’ 아닐까. 아이들의 사고는 기성세대가 만들어낸 문화의 바로미터다. 인권교육 이전에 자유로운 아이들의 세계를 어른들의 편견으로 물들이지 않는 것 또한 우리가 안은 중요한 과제이다.

장희숙 교육지 ‘민들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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