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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재직하던 학교에서 5학년 담임을 맡았을 때 일이다. 월요일 아침, 학급 회장 연희의 외침에 아이들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선생님! 제 책이 이렇게 되었어요.” 연희의 교과서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금요일까지 멀쩡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 몇 명이 가담한 건지, 이유가 무엇인지 온갖 상상을 했다. 왜 학생들 사이에 일어난 균열의 조짐을 눈치채지 못했나 자책감도 들었다. 아이들을 의심하지 않으면서 장본인을 찾는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주변 대다수 선생님들은 이런 일은 누가 했는지 찾아내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앞으로 교과서를 학교에 두지 않게 하거나 교실을 비울 때는 실물화상기를 폐쇄회로(CC)TV처럼 켜놓으라고 조언해 주었다. 하지만 건강한 공동체로 나아가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아이들을 단속하지 않으면서 매듭을 풀 수는 없을까.
그동안 교사의 통제나 학급임원의 리더십에 기대지 않고 학생들의 상호작용과 참여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민주적인 학급 문화를 만드는 데에 정성을 쏟아왔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만 하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교육과정을 통하여 더 많은 것을 배운다. 배움과 삶이 분리가 되고 관계를 피상적으로 맺는다면, 학교에서 아이들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
이번 일은 우리 반이 서로 믿고 돌보는 학급이었는지를 점검하고 자신과 학급의 일이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 기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연희가 체험학습으로 등교하지 않은 날, 슬프고 걱정되는 나의 마음을 아이들에게 꺼내놓았다. 우리 모두 이 일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동감했다. 아이들에게 종이를 나누어주면서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객관적으로 관찰할 수 있도록 글로 쓰게 했다. 만약 자기가 했다면 솔직하게 쓰기를 바란다는 말도 덧붙였다. 종이를 걷어서 읽어보니 속상하고 놀랐다고 했지만 자신이 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았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면 교실 공동체를 회복하기 어렵다. 다시 종이를 나누어주며 “선생님은 누군지 알게 되었어”라고 말했다. 지금이라도 스스로 밝히는 용기를 내주면 좋겠다고 했다. 두 번째 걷은 글에서 민주는 자신이 했다고 털어놓았다.
학급 부회장인 민주는 인기 많은 연희를 질투하고 있었다. 며칠 전 연희가 영어 학원 핼러윈데이 파티에 민주를 초대했다가 학원에서 참여인원을 줄이게 되어 초대를 번복하는 일이 생겼다. 감정이 폭발한 민주는 금요일 운동장에서 체육수업 중일 때 화장실을 간다고 하며 빈 교실로 올라와 연희의 교과서에 보복했던 것이다.
하교 후 민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민주가 느꼈을 상실감을 충분히 공감해주었다. 민주는 연희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고 나에게도 거짓말해서 죄송하다고 말했다.
경청과 연민이 없는 정의는 폭력이라는 말이 있다. 아이들을 믿고 스스로 성찰할 기회를 주며 연민의 마음으로 지켜봐 줄 때 실수도 배움이 된다. 아이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너그러운 시선으로 다가가 결핍을 조용히 채워 주는 것, 교사의 소임 가운데 하나다.
<위지영 서울 신남성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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