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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외를 먹다가 나도 모르게 참외 씨를 삼켰다.

아아, 큰일 났다.

낼모레 내 몸에서 참외 싹이 파랗게 돋아날 테니.

 

여름 텃밭

줄줄이 뿌려 심은 며칠 만에

파란 싹 뾰조록이 나오던 배추 씨처럼.

 

어떡하나,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참외 씨를 꿀꺽 삼키고야 말았으니.

 강인한(1944~ )

언덕 위에 밭 한 뙈기 있었다. 태어나 처음 가져본 우리 땅이었다. 그해 그 땅에 고추를 심었는데, 어느 날 밭 가장자리에 개똥참외 하나가 허락도 없이 더부살이하고 있었다. 노랗게 익을 때까지 침을 꼴깍이며 기다리고 기다렸다. 마침내 다 익었다 싶을 즈음 밭에 가봤더니 누군가 벌써 따먹고 없었다.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동심이 밭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희수(喜壽)의 시인은 동심으로 돌아간 듯 천진하다. “나도 모르게 참외 씨를 삼켰”는데, “내 몸에서 참외 싹이” 돋아날 것이라며 걱정이 태산이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똥 마려운 아이의 모습이 연상돼 입가에 웃음이 번진다. 슬쩍 능청도 보인다. 하지만 곤충을 숙주로 삼는 동충하초나 무심히 던져놓은 검은 비닐 속 감자에서 싹이 나는 것을 생각해 보자. “파랗게 돋아날” 싹은 결국 내 몸을 자양분 삼아 자라는 것이고, 이는 곧 나의 죽음을 의미한다. 동시 같은 가벼운 문장에 감춰진 묵직한 사유에 절로 고개가 숙어진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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