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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는 한두 평 여름밭을 키운다
재는 것 없이 막행막식하고 살고 싶을 때 있지
그때 내 마음에도 한두 평 여름밭이 생겨난다
그냥 둬보자는 것이다
고구마순은 내 발목보다는 조금 높고
토란은 넓은 그늘 아래 호색한처럼 그 짓으로 알을 만들고
참외는 장대비를 콱 물어삼켜 아랫배가 곪고
억센 풀잎들은 숫돌에 막 갈아 나온 낫처럼 스윽스윽 허공의 네 팔다리를 끊어놓고
흙에 사는 벌레들은 구멍에서 굼실거리고
저들마다 일꾼이고 저들마다 살림이고
저들마다 막행막식하는 그런 밭
날이 무명빛으로 잘 들어 내 귀는 밝고 눈은 맑다
그러니 그냥 더 둬보자는 것이다
문태준(1970~)
겨우내 비어 있던 밭은 따쓰운 봄볕에 꿈틀거린다.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는 생명이 초록을 밀고 나온다. 그들이 이 땅의 주인이지만 인간의 손은 사정이 없다. 잡초가 있던 자리에 고구마, 참외, 토란이 돋아난다. 봄밭은 쑥쑥 자란다. 하지만 여름밭은 너무 뜨겁거나 물이 흥건하여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다. 다시 “억센 풀잎들”이 “허공의 네 팔다리를 끊어놓”는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시인의 마음도 여름밭이다. “숫돌에 막 갈아 나온 낫”에 마음을 베일 것처럼 위태롭다.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마음에 잠겨 있다. “저들마다 일꾼이고 저들마다 살림”인 것으로 보아 먹고사는 문제와 연관되어 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다. 시인은 견디기보다 “재는 것 없이” 사는 것과 “그냥 둬보자는 것”을 선택한다. 행(行)하고 먹는데 거리낌이 없어지자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러자 여름밭과 시인은 “무명빛”으로 동화된다. “귀는 밝고 눈은 맑”아진다. 여름밭도, 시인의 마음도 평안해졌지만, 그 상태로 더 있기로 한다. 무아행(無我行)이다.
<김정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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