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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욱

평창의 발왕산은 만만한 산이 아니다. 희미한 등산로를 따라가는데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평전이 나온다. 걸음을 조절하여 일행과 뒤떨어져 혼자 있는 풍경을 만들어 본다. 어디선가 새 울음이 들리는 ‘옴방한’ 공간에 나를 밀어넣었다. 아무리 깊숙한 산중이라도 물리의 세계는 변함이 없다. 나무들은 크고 풀들은 작다. 이끼 덮인 돌에 내 그림자가 덮칠 땐 둘이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듯 묘한 느낌을 연출하였다. 아연 숙연한 기분이 들 때 나는 문득 내 나이를 생각하였다. 이건 지난 주말 나에게 틀림없이 벌어진 일이었다.

일주일이 어지럽게 흐르고 오늘은 태양이 가장 높다는 하지. 이에 더하여 일식이 일어났다. 태양-달-지구가 나란히 배열하면서 달의 그림자가 지구에 생기고, 이 그림자 안에서 태양이 달에 가려져 보였다. 나는 이 사실을 오후 5시가 지날 무렵에야 알게 되었다. 뉴스를 얼핏 듣긴 했으나 그만 깜빡했던 것. 그런 사정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한 친구가 바로 그 시간에 사진을 보내주었다. 하도 특이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직접 찍은 것이냐 물어보니 바로 답이 날아들었다. “거울 이용해서 찍었습니다. 태양은 정면 응시가 불가한 것이라. 해변에 누워 태양을 바라보며 끝내 눈을 감지 않고 자진 실명한 가공의 사례가 르 클레지오의 초기 소설에 등장하긴 합니다만.”

오늘은 그림자가 무척 승한 날이다. 다시 일주일 전 발왕산에서 찍은 사진을 뒤적였다. 산에 가서 사진 찍을 때 꽃-잎-그림자가 어울린 광경을 눈여겨본다. 돌에 비친 일식 사진엔 한참 못 미치지만 박새, 민백미꽃, 흰인가목의 잎에 꽃 그림자가 얹힌 것이 있었다. 달이 태양을 갉아먹는 일식에 주목해서인지 난티나무, 박쥐나무의 잎은 누가 크게 한 입 베어먹은 흔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은 친구와 그림자한테 크게 배웠다. 그림자에 관한 짧은 궁리로 마무리하자.

햇빛이 툭 던져주는 그림자는 어쩐지 내 모양을 본뜬 열쇠 같다. 나중에 땅을 따고 들어가야 할 때 꼭 필요한 그림자 열쇠. 혹 잃어버릴까 허리춤이 아니라 발바닥에 늘 차고 다니는 열쇠.

<이굴기 궁리출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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