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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말 정치인’을 다음 국회에서는 반드시 퇴출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컸던 선거는 이미 끝났지만 국회는 아직도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 여당은 거대여당을 만들어준 ‘민의’를 내세우며, 야당은 ‘의회독재’라는 논거로 대치상황을 각각 정당화한다. 남북 간에도 그 어느 때보다 비난과 증오를 담은 거친 언어가 오갔다.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6·15’ 20주년을 맞아 내보낸 담화문을 “본말은 간데없고 책임회피를 위한 변명과 오그랑수(속임수)를 범벅해놓은 화려한 미사여구”라고 직설적으로 비난한 북의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의 담화문은 남북관계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협치를 통해 국내 정치를 안정시키고 남북이 대화를 바탕으로 한반도에서 평화를 정착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과 글이 이렇게 어지러워진 것은 물론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특히 정보 매체의 다양화와 사회관계망의 확충은 정치적 공론의 장을 과거보다 훨씬 넓히지만 동시에 양산되는 저질의 언어로 정치생활을 오염시킨다. 차별을 조장하는 ‘혐오 표현’이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주로 인종주의적 발상에 기인해서 문제 되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뿌리 깊은 반공주의, 지역주의, 세대 차이, 성적 차별 등에 기대고 있다. 특히 대중적 이미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정치인들이 이런 분위기를 앞장서 부추기고 있다는 인상을 종종 받는다.
모든 정치 행위는 근본적으로 언어를 매개로 해서 이뤄진다. 언어가 정치의 단순한 도구만이 아니라 정치를 정치이게끔 하는 전제라는 뜻이다. 이런 이유에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중을 설득하는 말과 글을 정치의 본령 중 하나로 여겼다.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과 함께 소통의 도구로서 언어의 기능을 문제로 삼았던 플라톤의 <크라틸로스>나 ‘이름을 바르게 세움’(正名)과 더불어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 예(禮)를 알지 못하면 몸 둘 곳이 없다. 말(言)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고 했던 공자의 <논어>도 기본적으로 언어의 이러한 특성을 강조했다.
특히 정치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대중을 설득하고 동의를 얻기 위해 언어구사에서 특수한 기술이나 기법이 요구되었기에 유럽에선 일찍부터 논리학, 문법과 더불어 레토릭(수사학)은 교양의 기본이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을 ‘변증법의 어린 가지이지만 윤리에 복무하는 정치에 걸맞다’면서 많이 발전시켰다. 그러나 계몽기와 낭만주의의 발흥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수사학은 이내 시들해졌다. 수사학의 굳어버린 규칙이 개인의 감성과 창발성을 억누르고 대중을 오도하는 ‘기술’에 불과하다는 비판 때문이었다. 괴테도 ‘충만한 가슴속으로부터 나온’ 언어만이 윤리적인 호소력을 지녔다고 강조했다.
어떤 의미에서 동양 문화권에서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수사학은 이런 비판을 이미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주역>에 ‘수사입기성(修辭立其誠)’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말을 닦음으로 성실함을 세운다’는 뜻으로 군자는 말을 할 때 먼저 성실함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성실함의 어원도 말로 이루는 것을 뜻하기에 수사학이 그저 말 잘하는 기술이 아니라 자연 또는 본성에서 우러나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유럽 문화권에 같이 속하더라도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독일에서는 수사학이 여전히 부정적인 인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오랜 논쟁문화의 전통, 프랑스에서는 자국 문화와 언어에 대한 특별한 자부심으로 인해 그렇게 부정적이지만은 않다.
같은 동양 문화권에 속하더라도 한국의 체면, 중국의 몐쯔(面子), 일본의 속내(本音)와 겉마음(建前)처럼 수사학적 이해에서 미묘한 차이가 있다. 또 수사학이 일반적으로 조작이나 선동을 연상시켜 부정적으로 이해되는 남한이나 일본과 달리 북한과 중국에선 사회주의 수사학의 전통에 따라 혁명과 건설을 적극 추동하는 선전과 선동 부서를 당 중앙에 두고 있을 정도로 정치적 수사학을 중요하게 여긴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 종종 반공 웅변대회가 열렸다. 국회의원 선거 유세장에서 보았던 어른들을 흉내 내는 아이들의 말투나 몸짓이 너무나 우스꽝스럽고 싫었다. 주로 청중을 앞에 둔 상황을 전제한 이런 정치적 수사학도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와 같은 다양한 사회관계망서비스를 이용한 지 이미 오래다. 마케팅을 염두에 둔 ‘퍼블릭 리레이션’이 지향하는 것처럼 정치 선전과 홍보도 마치 고객을 끌기 위한 상품 광고처럼 하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정치적인 것의 내용 전달보다는 이를 어떻게 그럴듯하게 포장하는가 하는 문제가 정치적 소통의 주제가 되었고 이른바 ‘유체이탈 화법’이라는 말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화자의 영혼이 사라진 말이 여러 가지 현란한 이미지로 포장되어 정치적인 것으로서 대중에게 전달된다. 이에 따라 민주주의, 정의, 통일과 같이 자주 사용되는 정치언어도 차분한 의미론적인 검증 없이 진영논리 안에 갇혀 제자리를 돌고 있다.
그러면 정치의 도구로서 언어는 제구실을 할 수 없는가. 정치를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의 덕목으로 막스 베버는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정열, 책임감 그리고 균형감을 들었다. 나는 이러한 조건을 충족시킨 정치인으로 빌리 브란트를 우선 꼽는다. 그의 정치언어는 먼저 성실성에서 출발한다. 능변도 아니고 쉼도 길어 사람에 따라서는 지루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언어에서는 사람됨 전체를 느끼게 한다. 성공과 실패, 객관성과 도덕성, 권위와 인간성을 함께 담은 그의 언어는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여전히 감동을 준다. 정치는 곧 진솔한 언어적 행위여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좋은 사례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학교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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