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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 사회에는 봉건주의의 흔적이 여전히 조류처럼 흐른다.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 사이로 스민다. 누구도 이에서 자유롭지 않다. 애써 성찰하고 떨쳐내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게 물이 들기 마련이다.
권력자 개인에 대한 숭배에 가까운 ‘과잉 의전’은 대표적인 잔재이다. 강력한 위계질서 속에 생살여탈권을 쥔 윗사람을 떠받들어 모신다. 예로 16세기 일본의 무장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자신이 모시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신발을 눈이 오는 겨울날 가슴에 품어 따뜻하게 데웠다는 설화가 있다. 상사에 대한 지극정성이 이쯤 돼야 출세할 수 있다는 비유이다.
최근 물의를 빚은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직원에게 ‘요구’한 ‘의전’ 내용을 보면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수준이다. 상사에게 걸려온 전화를 24시간 상시 받을 수 있도록 대기하고, 음주운전 때 대리기사 역할을 하는 등 집안의 자잘한 업무까지 도맡거나, 심지어 샤워 이후 입을 속옷까지 챙기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과잉 의전은 이전 보수정권 때에도 문제이긴 했다. 현충원 방명록을 쓰는 정치인이 손 시리지 않게 핫팩을 끼워넣어 종잇장을 데운 일, KTX를 타려는 총리를 실은 승용차가 서울역 플랫폼까지 진입한 사건 등이 구설에 오른 적 있다. 다만 이번 사건들이 더 씁쓸한 이유는 이른바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에 천착해온 인사들마저도 무소불위 지자체장이 되고는 이 같은 지시를 거리낌 없이 내렸다는 데 있다.
권력을 쥐고 사람이 바뀌었을지 모른다. 스코틀랜드의 뇌과학자 이안 로버트슨에 따르면 권력은 뇌 구조를 변화시킨다. 남녀를 불문하고 권력을 쥐면 ‘쾌락’과 관련된 뇌신경 물질인 도파민 분비를 촉진하는 테스토스테론이 증가하고, 마약과 마찬가지로 더 많은 권력에 탐닉하면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이 떨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데이비드 데스테노는 권력을 쥔 이들이 부패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원래부터 눈앞의 이익에 민감하고 신뢰성 없는 행동을 부추기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저서 <신뢰의 법칙>에 그가 인용한 연구들에 따르면 순간적으로나마 자신의 이익이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권력자의 지위’에 앉았던 사람은 남에게는 엄격하되 자신에게는 관대해지는 성향을 보였다. 도둑질을 한 뒤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능력은 권력의 크기에 비례했다. 그러니까 상당한 도덕 감각을 갖추고 있지 않다면 권력을 쥔 사람은 이기적인 폭군이 될 가능성이 높은 셈이다.
인간에게 이런 본성의 위험이 있다면, 투표를 통한 선출로 권력을 위임받은 이들에 대해 엄격한 견제와 감시를 작동하는 게 민주사회가 마련할 ‘안전핀’일 것이다. 하지만 최근의 사건들을 볼 때 우리 사회는 이 부분을 놓치고 있다. 떼쓰는 아이의 요구를 죄다 수용하는 것이 좋은 양육법이 아니듯이 권력을 쥔 이들의 요구대로 의전이 굴러가는 조직은 결코 건강할 수 없다. 직원들 본연의 업무는 효율적인 업무로 행정을 매끄럽게 하는 것이지 ‘심기 경호’나 ‘욕구 충족’이 아니다. 인력을 그렇게 사적으로 부리라고 국민이 세금 내는 게 아니다.
게다가 시대착오적 의전은 공직자의 현실 감각을 마비시켜 결국엔 사회비용으로 돌아온다는 점에서도 문제가 된다. 세상은 바뀌고 있고 새로운 세대와 조직은 이미 수평적 문화를 적극 수용하고 있다. 1990년대생은 승용차나 회의실의 ‘상석’이 어디인지 따지는 직장문화를 구닥다리로 여기며 갑갑해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기업들은 수평적 문화를 조직의 DNA로 삼아 혁신을 이루는 중이다. 세계적 히트작인 ‘배틀그라운드’로 유명한 게임회사 크래프톤은 대표를 포함해 모든 임직원이 같은 크기의 책상을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터넷전문은행 카카오뱅크는 직급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의견 개진이 가능한 문화로 은행권 젊은 인재들을 끌어들이고 있다. 경쟁과 변화가 필요 없는 ‘고인 물’ 같은 조직에나 봉건시대 같은 의전문화가 공고할 뿐이다.
한국은 제도로서 민주화는 완성됐지만, 생활 속 민주화는 아직 진행 중이다. 하청업체의 대기업 갑질 폭로와 직장인들의 사내 괴롭힘 고발 등은 그 과정에서 이뤄지고 있다. 추세에 맞춰 조직단위나 국가의 공식 행사를 제외한 개인에 대한 의전을 최소화하는 것은 어떨까. 공직자들의 일상에서 봉건성을 걷어내 그들이 권력에 취할 가능성을 미리 방지하도록 하자.
<최민영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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