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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_김상민 기자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현이 말씀하시되 ‘병으로 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진 불교의 경전 ‘보왕삼매경(寶王三昧經)’의 첫 구절이다. 학설이 분분하지만, 중국 명나라 때 고승 묘협(妙협)이 지은 <보왕삼매염불직지> 중 일부라고 한다. 

이 삼매경은 같은 운율로 구성되어 있다.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공부하는 데 마음의 번잡함이 없기를 바라지 마라, 수행하는 데 마(魔)가 없기를 바라지 마라, 일을 꾀하되 쉽게 되기를 바라지 마라, 친구를 사귀되 내가 이롭기를 바라지 마라, 남이 내 뜻대로 순종하기를 바라지 마라, 공덕을 베풀려면 보답을 바라지 마라, 분에 넘치는 이익을 바라지 마라, 억울함을 당했다고 밝히려고 하지 마라.

바라지 마라. 행복에 대한 소망은 화를 부르니, 인생고를 받아들이고 재해석하라는 뜻이다. 원말명초때 작품이니, 인생이 고달프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가 보다. 이 글귀에 위안을 얻는 이도 있겠지만, 답답한 이도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다음과 같은 의심이 들 수 있다. 이런 말을 따르다 사기만 당하는 것은 아닐까. 포기와 실패를 합리화하는 것은 아닐까, 억울하면 저항해야지 참으라고? 이것은 지배 이데올로기가 아닐까. 하지만 보왕삼매경은 포교가 아니라 삶의 조건을 말할 뿐이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노력하든 마음을 비우든, 어차피 인생은 결핍을 인정하고 대처하는 일이다.

섣달그믐날 자정 1초 뒤에 갑자기 다른 세상이 오는 것도 아닌데, “희망찬 새해”가 난무하는 때가 왔다. 희망을 갖자, 희망을 달라, 희망이 있어야 살지. 나는 희망을 숭배하는 사회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희망, 소망, 원망(願望). 모든 바람은 실상, 원망(怨望)이 되기 쉽다. 바람은 우리가 원하는 것이지 실제도 인식도 판단도 아니기 때문이다.

희망은 불가능한 관념이다. 희망은 미래를 상정한 사고방식인데, 미래(未來)는 글자 그대로 영원히 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희망의 속성은 끝없는 지연(遲延)이다.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다”이지, “지금 그렇다”가 아니다. 흔히 종교가 희망과 위로를 준다고 하지만 종교의 본뜻은 아니다. 종교(宗敎) 역시, 문자 자체에 충실하다. 종교는 ‘으뜸 가르침’이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마법이 아니다.

라인하르트 코젤렉의 지적대로, 근대에 이르러 인간의 경험은 과거로 치부되고 극복해야 할 시간이 되었다. 시간의 서열이 생긴 것이다. 인간의 사유가 ‘지금, 여기’에서의 인식이 아니라 ‘이후에 원하는 의미’로 변화한 것은 문명사적 사건이었다. 인류는 미래의 포로가 되었다.

현실과 희망이 일치하는 경우는 없다. 희망 달성 이후 더 높은 희망, 과제, 욕망이 생긴다. 여기서 우리는 진짜 불행에 포획된다.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다.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우리 몸은 통치의 담보물이 된다. 오늘날, 이 통치는 지구를 칭칭 감고 있는 자본주의의 그물 속에서 힘겹게 생존하는 주체적 종속의 시대를 열었다. 주체적 종속의 엔진은 우리 자신의 욕망이다.

욕망과 희망은 어감의 차이가 커 보이지만, 희망은 욕망을 부드럽게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더 벗어나기 어려운 권력이다. ‘희망 고문’이 가장 쉬운 예다. 기대가 클수록 만족보다는 부담이 커지는 경우가 많다. 인간관계의 번뇌는 애증이 아니라 지속되는 부담에서 온다. 그래서 희망의 반대말은 절망이 아니라 자기만족이다. 희망을 가지면 다소 마음이 편하다. 덜 골치 아픈 삶, 생각하는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라디오를 듣다보면 프로그램은 달라도 다음과 같은 사연이 반복된다. 당대 사람들의 반성과 다짐이다. “저는 이제까지 ‘사는 대로 생각’해 왔어요. 앞으로는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아, “하면 된다”는 새마을운동의 명줄은 언제 끊어지는가. 이 언설은 우리에게 굉장히 익숙하지만, 실제로 생각하는 대로 살다가는 죽을 수도 있다. 우리가 상정한 상태(‘생각’)로 살고 싶기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것이다.

몸은 생각을 실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삶을 살아내는 주체다. 생각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일단, 생각 자체가 분명한 이도 드물다. 세상은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뜻(사회적 구조)의 피억압자로 살아간다. 위정자들이라고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 것도 아니다. 생각은 바람이 아니라 현재 나의 행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희망 달성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산 대로 생각할 때, 삶은 위로와 사유의 수원이 된다.

“새해 모든 이의 소망이 다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연말 즈음 또 하나의 재앙 담론이다. 건강, 돈, 취직, 국회의원 당선… 사람들의 소망은 비슷하다. 점입가경, 소망을 대의로 포장하는 사람도 있다. 세상이 지옥인 이유는 모든 이들이, 자기 소망을 동시 달성하려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최소한, 의미 없는 대립이 계속된다. 바로 올해처럼.

<정희진 여성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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