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에 네 명의 청춘이 가슴 벅차 하고 있었다. 3800㎞의 남아프리카를 종단하는 11일간의 자동차 여행, 주인공은 24세 박보검, 27세 고경표, 31세 동갑 안재홍과 류준열이었다. 최근 종영된 tvN 이야기다. 출연료 받고 비행기 타고 아프리카에 가서 많은 스태프가 보는 가운데 배낭여행 방송을 찍었으니 또래는 물론 아줌마·아저씨 시청자도 부럽기 짝이 없다. 로 막 스타가 되고 선물 같은 해외여행까지 마치고 귀국하면 매니저와 팬들과 빼곡한 일정이 기다리니 얼마나 좋을까. 실제로 그들은 여행 내내 활짝 웃거나 울컥하면서 “감사하다”를 연발했다. 툭하면 “감사하다”를 격하게 합창하는 네 명의 청춘이 나오는 TV 앞에서 나는 ‘심쿵’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뛴 것은 나미비아의 나미브 사막에 펼쳐진 모래언덕과 ..
1. 빈센트 반 고흐는 구두 그림을 여러 점 남겼다. 목이 긴 구두나 짧은 구두를 포함해 구두만 그린 그림이 일곱 점이나 된다. 그릇이나 물병과 더불어 정물화로 그린 구두 그림도 두 점 있다. 이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끈이 달린 낡은 구두’라는 제목이 붙은 그림이리라. 늙은 농부의 얼굴처럼 굵은 주름이 잡힌 구두는 끈이 풀어진 채 늘어져 있고 왼쪽 구두의 목은 접혀 있다. 해바라기 같은 화려한 작품에 가려 관심을 끌지 못하던 구두 그림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그려진 지 50년이나 지나서다. 하이데거가 에서 고흐의 구두 이야기를 하면서 이 낡은 구두가 단번에 인문학의 화두로 부상한 것이다. 여기에 기름을 부은 이가 미국의 미술사학자 샤피로다. 하이데거가 아무런 검증도 없이 ‘끈이 달린 낡은 구두’를..
1. 다윈의 , 호프스태터의 , 하이젠베르크의 , , , , , , 플라톤의 , 아리스토텔레스의 , 칸트의 , 마르크스의 , 푸코의 …. 서울대 추천도서 100선 중 일부다. 또 다른 대학의 추천도서에는 뉴턴의 , 아퀴나스의 , 칸트의 , 하이데거의 , 헤겔의 , 소쉬르의 , 비트겐슈타인의 같은 책들도 보인다. 내가 무지한 탓인가. 여기에 적힌 책 가운데 제대로 읽은 것은 거의 없다. 물론 읽기를 시도한 책은 많다. 하지만 은 지루해서, 는 어려워서 포기했다. 은 일부만 읽었을 뿐, 그 방대한 양에 질려 전체를 읽을 엄두도 못 냈다. , 은 하이데거, 헤겔의 저작들과 더불어 서가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애물단지다. 도 내가 무슨 생각으로 저 책을 샀을까 생각하는 책 중 하나다. 도대..
봄꽃 흐드러지게 필수록 아파오는 세월호의 기억 때문인가. 지난 1월에 비해 공동체를 찾는 사람들이 줄었다. 빼어난 학자를 삼고초려해 개설한 강좌에도 정성들여 준비한 세미나에도 사람이 찾지 않는다. 북적대던 공동체가 더러 절간처럼 고요하다. 이러다 망하려나…. 사람이 줄어드니 이곳을 거쳐간 사람들에 대한 생각도 많아진다. 공동체에서 공부하며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던 한 청년이 어느 산별노조의 기관지를 만드는 곳으로 떠났다. 몇몇 진보 언론사의 최종 면접까지 갔던 글 잘 쓰고 심성 좋은 친구다. 노조야말로 글 잘 쓰고 능력 있는 친구가 필요하겠거니 하면서도 하필 그 청년인가 싶어 짠하다. 1980년대 노동현장에 청년을 보내는 느낌이 이랬을까. 이제 서른 안팎인 그 친구는, 어쩌면 1980년대보다 더 엄혹한 시..
공동체 안채의 방 이름을 볼 때마다 내 빈약한 상상력을 드러내는 것 같아 좀 민망하다. 크기와 위치에 따라 그냥 큰방, 골방, 작은방, 더 작은방이라고 이름 지은 탓이다. 이에 비해 퇴계실, 화담실, 다산실 등 한자 문패가 붙은 사랑채는 지적으로 느껴진다. 역시 철학자가 지은 이름은 다르다. 좌식으로 꾸며진 안채 골방에는 대체로 좌식에 맞는 공부 모임이 든다. 좌선과 함께 공부하는 강의, 라틴어로 성경 읽기, 희랍어로 낭송하기, 읽기 등이 그것이다. 큰방이나 작은방에 드는 모임을 가르는 기준은 하나다. 참여자의 수에 따르는 것이다. 일주일 단위로 돌아가는 60~70개의 공부 모임 중에서 큰방에 드는 모임은 여섯 개. 경쟁률이 10 대 1이나 되니 큰방에 드는 공부 모임으로 인문학의 흐름이랄까, 유행을 감..
소설가나 시인이 되기 위해 문예창작과에 갈 필요가 있을까. 그림이나 조각을 하기 위해 반드시 미술대학에 가야 하는 것일까. 혹시 문창과나 미술대학 등에서의 공부가 빼어난 예술가가 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그보다,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 문학을 공부하고, 훌륭한 소설을 쓰기 위해 철학을 공부해 보는 건 어떨까.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피아노부터 배우는 것은…. 예술이건 학문이건 관계없이 중요한 것은 지적 감수성과 상상력이라며 이를 강하게 자극하는 프로그램을 공동체에 제안한 이가 있다. 문학 철학 텍스트와 시각, 청각, 영상 텍스트를 한꺼번에 공부하며 소설가(지망생)는 그림을 그리거나 사진을 찍고, 화가(지망생)는 글을 쓰며, 철학 연구자는 춤을 추고 작곡을 하는 식의 프로그램을 해보자는 것이다. ..
매주 토요일 오후,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는 피아노 선율에 맞춘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공동체에 꾸려진 작은 합창단의 합창이다. 10명이 채 안되는 합창단 참여자는 1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하다. 이들이 모인 것은 두 달 전, 처음 수줍어하며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던 이들은 이제 거침없이 노래를 부른다. 서투르게나마 화음도 맞춘다. 주말인데도 결석하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로 참여자의 만족도도 높다. 노래를 하다 보면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위로받고, 마음의 상처들이 알게 모르게 치유된다는 것이다. 특히 10대 아들과 같이 합창단에 참여하는 40대 엄마는 “사춘기가 되면서 멀어져 가던 아이와 함께 화음을 맞추며 마음까지 나눌 수 있는 매우 특별한 자리”라며 좋아한다. 그런가 하면 매주 화요일 낮, 공동체에서..
들뢰즈의 를 강의하는 김재인 박사가 양손 가득 새 책을 들고 왔다. 자신이 번역한 를 수강생 수에 맞춰 예약했다 책이 출간되자마자 들고 온 것이다. 교정 전의 번역 원고를 복사해 공부하던 수강생들이 새 책을 받아들고 반색했다. 누군가가 와인을 준비했고, 강의실이 잠시 새 책 사인회장으로 바뀌었다. 사인을 하는 김 박사의 표정도 아이처럼 밝았다. 그러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어 원서 500쪽, 한글본 700여쪽, 책을 번역하는 데 10년이나 걸렸다지 않은가. 그러나 내막을 알고보면 마냥 즐거워할 일만은 아니다. 학술서로는 드물게 2000부를 찍은 이 책을 번역한 대가로 김 박사가 받을 인세는 세전 330만원. 그러니까 그 난해한 책을 10년에 걸쳐 번역하고 330만원을 번 것이다. 그나마 이 책은 초판을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