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정반대의 결과로 끝났지만, 미국 대통령 선거 당일 트럼프가 승리해 재선에 성공할 것으로 예상되던 때가 있었다. 다른 나라 선거인데도 정치인으로서 그 장면을 지켜보면서 상당한 실망과 심리적 충격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대가 그런 것인가’ 하는 좌절감을 떨칠 수 없었다. 처음 트럼프가 당선된 것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엘리트주의와 특권의식에 젖은 기성 정치인들에 대한 반발, 계층 간 이동이 극심하게 어려워지면서 희망을 잃은 사람들의 불안이 포퓰리스트를 통해 표출된 것이 하나의 원인이라고 진단할 수 있다. 이해관계의 조정과 사회통합이라는 제 역할을 못해 회초리를 맞은 그때까지의 정치를 재정비하는 계기로 삼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지막지한 편 가르기와 ..

“그분이 떠내려갔거나 혹은 월북을 했거나 거기서 피살된 일이 어떻게 정권의 책임입니까?” 서해에서 북한군이 우리 국민을 사살한 사건에 대해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한 발언이다. 북한을 규탄하면 모를까 문재인 대통령의 잘못을 따지는 것은 정쟁에 불과하다고도 했다. 얼핏 보면 맞는 말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대통령이 무엇을 할 수 있나. 일각에서는 우리 고속정이 출동해서 구출했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북한이 지배하는 수역에서 작전을 벌이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북한 해군이 대응에 나서서 자칫 군사적 충돌이라도 벌어진다면 심각한 상황이 된다. 그러나 이런 발언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국가는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무한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보..

‘검찰개혁’은 마법의 주문이다. 무슨 공격을 당하든 맥락과 상관없이 “지금 검찰개혁이 시급한데 왜 이러십니까”라고 하면 답변이 된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언행불일치를 지적하면, “우리가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라 검찰개혁이 중요해서 가만히 있는 겁니다”라는 반박을 듣는다. 현직 법무부 장관 아들의 병역 문제와 관련해서도, “추미애가 무너지면 검찰개혁이 날아가고, 결국 문재인 정부 위기로 간다”라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언론에서도 은연중에 조국 전 장관이나 추미애 장관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검찰개혁을 중시하는 사람이고, 비판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검찰개혁보다는 다른 가치를 더 중요하게 보는 사람이라는 구분을 한다. 일각에서는 심지어 개혁에 저항한다고 몰아붙이기도 한다. 나는 ..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진영논리다. 편 가르기를 넘어서 극도의 적개심을 보인다.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자기 진영의 유불리에만 신경을 쓴다. 모두의 안전이 걸린 코로나19 대책과 관련해서도 상대편의 책임을 부각시키고 윽박지르는 데 여념이 없다. 남 탓하기, 온라인에서 집단으로 몰려가서 인신공격 퍼붓기가 만연해 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를 얼마 남겨두지 않은 2017년 4월3일 저녁. 이제 막 민주당의 대선후보로 선출된 문재인 후보는 경선 과정에서 지지자들이 상대 후보 측에 18원의 후원금과 함께 문자폭탄을 보내고 비방하는 댓글을 조직적으로 올린 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는, “(그런 일들은) 경쟁을 더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
검찰은 국민들을 상대로 한 신뢰도 조사에서 항상 꼴지 언저리에 있었다. 지난 정권들은 물론 3년간 입만 열만 검찰개혁을 부르짖은 이번 정부 들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개검” “떡검” 등 검사들을 부르는 멸칭이 귀에 익숙해진 지도 오래다. 이 정도면 과감하게 검찰을 없애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법도 하지 않나? 민주주의의 선진국이라는 영국에는 1985년까지 검찰이 없었다. 도대체 검사란 왜 존재하는가? 물론 검찰은 필요하다. 이런 사례를 보자. 우리나라에 특별검사 제도가 도입되고 얼마 후 특검보로 선발된 변호사가 강압수사를 했다는 이유로 해임된 일이 있다. 피의자의 발을 걷어차고 소리를 질렀다. 그의 주장은, 변명으로 일관하는 피의자를 상대로 진실을 밝히려는 의욕이 앞서서 그랬다는 것이었다. 충격파는 컸다..
귀여운 모글리가 주인공인 을 쓴 러디어드 키플링은 제국주의자다. 대표작인 에 등장하는 인도 사람들은 유럽인들과 다른 열등한 종족일 뿐이다. ‘백인의 부담(The White Man’s Burden)’이라는 시에서 그는 “반쯤은 사악하고 반쯤은 어린애 같은” 식민지 사람들을 정복하고 교화하는 백인들을 찬양하고 있다(이 시는 필리핀의 독립운동을 탄압한 미국인들에게 영감을 얻어서 쓴 것인데 당시 필리핀인 25만명이 살해당했다). 키플링은 1907년 영국인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대니얼 디포의 는 한술 더 뜬다. 무인도에 표류해서 28년간 살면서 그곳을 개척하고 원주민을 잡아 하인을 삼는 주인공은 사실 영국 제국주의 그 자체의 상징이다. 대영제국을 꿈꾸던 당대의 독자들이 열광한..
더불어민주당 김태년 원내대표가 3일 “법이 정한 날짜에 국회를 연다”고 밝혔다. 미래통합당의 동의가 없어도 5일 본회의를 열어 국회의장단을 선출하겠다는 것이다. 원구성 협상 타결 후 개원을 주장하는 통합당의 주호영 원내대표는 이를 ‘히틀러식 독재’라며 반발하고 있다. 법정 시한 내 개원은 당연히 지켜야 한다. 늑장개원이란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자는 주장도 맞다. 문제는 177석 거대여당 민주당의 협상 의지와 태도다. 여야가 함께하는 시한 내 개원을 성사시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 원구성은 교섭단체 간 협상으로 이뤄졌다. 그런데 민주당은 18개 상임위원장을 모두 가질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고 있다. 제1야당의 주장은 아우성 정도로 취급한다. 협상전술이겠지만 지나치다. 일하는 국..
코로나 시대를 어떻게 견뎌야 할까. 지난 세기의 책 속에서 몇 가지 그림을 찾아볼 수 있다. 1348년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치명적인 흑사병이 돈다. 감염되면 사타구니와 겨드랑이에 달걀 크기의 종기가 생기고 온몸에 반점이 나타난다. 증상이 보이면 예외 없이 며칠 안에 죽는다.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사망자가 나오는 가운데 온 도시가 혼란에 빠져든다. 절제된 생활을 하면 병이 피해갈 것이라고 여기고 무리를 지어 은둔을 하는 사람들, 어차피 닥쳐올 죽음을 면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음주와 방탕으로 불안을 달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열 명의 선남선녀가 시골 별장으로 표표히 떠난다. 조반니 보카치오의 은 이 귀족들이 각자 하루에 하나씩 열흘에 걸쳐 풀어놓는 이야기를 모은 것이다. 중세사회의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