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책 나누기 운동본부’의 M본부장을 만날 때마다 나는 깜짝 놀라곤 한다. 나보다 한참 손위의 그녀가 지난번엔 노랑머리 이번엔 빨간 머리, 팔색조처럼 매번 새로운 머리 모양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파격은 그뿐이 아니다. 격식을 갖추어 예식을 진행하고 단체사진을 찍을 때에도 검은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독특한 스타일이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독서운동을 벌이는 주 무대가 바로 병영이기 때문이다. 1999년부터 지금까지 문화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군부대에 독서운동을 전개하고 총 76개의 병영도서관을 개관한 그녀는 가장 군을 잘 알고 사랑하는 민간인이라 할 만하다. “본부장님은 참 용감하신 것 같아요. 빨간 머리에 선글라스 차림으로 ‘별’들과 어깨를 겨루고 기념사진을 찍으시니….” 존경심과 의..
컴퓨터를 켜면 펼쳐지는 바탕화면에는 복숭아를 향해 한껏 입을 벌린 아기 사진이 배경으로 떠 있다. 평생 할 효도의 90퍼센트 이상을 한다는 그 짧은 시간의 황홀하도록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싱그러운 과육 냄새와 팔뚝을 타고 흐르던 단물까지도 여전히 생생한데, 내 곁에는 사진 속의 천사 대신 오늘 아침에도 까닭 모를 짜증과 심술을 부리다가 기어코 현관문을 부서져라 닫고 등교해버린 여드름투성이만이 있을 뿐이다. 그놈이 가장 예뻤던 때를 추억하며 참아야 하니라 되뇌고 되뇌는, 나는 그 이름도 처연한 ‘고3 엄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뺨따귀를 한 대 얻어맞는 기분으로 3월 모의고사와 4월 모의고사를 치렀다. 등급 컷을 확인하고, 원점수와 표준점수와 전국 백분위를 구분하고, 대학들이 장기짝 옮기듯..
모친상을 당한 시인 J에게 문상을 갔다가 평론가 K선생을 만났다. 상갓집에서 조문객들끼리 하는 대화가 으레 그러하듯 삶과 죽음에 대한 속절없는 사설을 몇 마디 주고받다가, 문득 K선생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 강화도에 볼일이 있어 다녀오는 길에 교훈이 ‘염치’인 학교를 보았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작가들이 저마다 모교의 ‘고리타분한’ 교훈들을 주워섬기는 가운데 그 ‘참신한’ 교훈이 한층 흥미로워졌다. 집에 돌아와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정말 있었다! 김포시 대곶면에 자리한 ‘대곶중학교’의 교훈이 바로 친애, 정성, 그리고 ‘염치’였다. 대체 누가 지은 교훈일까? 곱씹을수록 감탄스러운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대곶중학교 홈페이지에 ‘염치’는 ‘결백하고 정직하며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으로 ..
부모는 성장하는 자식에게 일종의 ‘허들’과 같다. 삶이라는 장애물 경주에서 제일 먼저 맞닥뜨리는 허들이기에, 그것을 어떻게 뛰어넘느냐에 따라 완주하느냐 포기하느냐가 결정되고 기록이 달라지기도 한다. 부모의 낮은 허들을 가뜬히 뛰어넘고서야 세상의 높은 허들에 두려움 없이 도전할 수 있다. 지배와 통제를 포기한 낮은 허들이 자아존중감과 용기를 키워주기 때문이다. 반면 부모가 너무 높은 허들이 되어버리면 멈칫댈 수밖에 없다. 심지어 걸려 넘어지기도 한다. 부모가 성취한 것보다 더 나은 것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자식의 비극이다. 그래서 조선조의 어느 현명한 아버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이라는 정승 자리에 오를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판서에서 행보를 멈췄다고 한다. 자신이 벼슬아치로서 닿을 수 있는 최고의..
동향의 선진이신 극작가 신봉승 선생을 만나 점심을 먹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었다. 선생이 대표작인 대하드라마 을 집필할 당시 부족한 자료를 구하기 위해 가장 많이 찾은 곳은 다름 아닌 남산 도서관 ‘앞’이었다고 한다. 드라마가 방영된 기간은 1983년부터 1990년까지인데, 1968년에 시작된 국역 간행 작업은 1993년에야 끝났기 때문이다. 1991년에 북한이 먼저 완역을 마치자 경쟁심에 불타오른 남한 정부가 급히 작업을 재촉한 터라 오역이 많았다는 뒷이야기는 제쳐 두고, 아무튼 자료를 해독하는 데 난항을 겪던 선생은 시시때때로 을 품은 채 남산 비탈을 뛰어올랐단다. 도서관 ‘안’에서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가 도서관 ‘앞’에서 풀렸다. 남산 도서관 앞 나무그늘 아래서 바둑을 두고 계시던 흰 수염 훨훨 ..
토머스 모어에 의하면 ‘유토피아’에 사는 사람들의 취침시간은 8시간이다. 그 정도의 잠이라야 셰익스피어의 말대로 “삶이라는 축제를 가장 빛나게” 해줄 수 있고, 그런 단잠 속에서라야 찰스 디킨스가 읊조린 “부자와 거지를 계급에 관계없이 하나로 묶어주는” 꿈을 꿀 수가 있다. 식욕 그리고 성욕과 함께 수면욕은 인간의 3대 본능 중 하나다. 비록 그 때문에 인생의 3분의 1을 ‘낭비’한다고 투덜대는 악바리들이 없진 않지만, 달콤한 잠만큼 좋은 휴식은 없다. 그런데, 여기 잠 때문에 일터에서 내몰린 사람들이 있다. 2011년 5월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유성기업 아산공장의 투쟁은 밤잠을 좀 제대로 자자는, 지극히 소박하면서도 절박한 요구에서 시작되었다. 그때까지 그들은 ‘올빼미’로 살았다. 혹독한 야간노동은 평..
이게 과연 심리학에서 말하는 ‘망각의 역현상’인지, 어제 일도 까맣게 잊어버리는 주제에 이십삼년 전 그날이 그린 듯 생생하다. 그날은 어버이날이었다. 4월26일 사복경찰의 쇠파이프에 맞아 숨진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의 시신이 모교 병원의 영안실에 안치된 후, 얼결에 투쟁의 중심지가 되어버린 학교를 지키며 열이틀째 철야농성을 하던 불효녀에게는 쇳덩이를 삼킨 듯 마음이 무거운 날이었다. 당연한 일상을 영위하기엔 부당한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났다. 강경대가 죽고 사흘 뒤에 전남대 박승희가 분신했다. 박승희가 죽고 이틀 뒤에 안동대 김영균이 분신했다. 김영균이 죽은 이틀 뒤에 경원대 천세용이 분신했다. 다시 사흘 뒤,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던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스스로 몸에 불을 ..
때로 시절은 사람과 함께 간다. 철학자 들뢰즈와 가수 김광석이 떠났을 때 나는 젊은 날의 빛이 스러지는 것을 느꼈고, 그로부터 얼마 뒤 영화배우 장국영이 떠났을 때 마침내 소년과 소녀의 계절이 끝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은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적어도 수사 당국이 발표한 사인은 그랬다. 하지만 그들을 사랑했던 나는 그들의 자기 살해를 좀처럼 믿을 수 없어서 분노했다. 이 먼지와 티끌의 진창 속에 나를 버려두고, 어떻게 자기들만 떠날 수 있나? 그것은 맥없이 흘러버린, 돌이킬 수 없는 시절에 대한 상실감과 배신감이기도 했다. 선배 정은 택시 운전수다. 그는 하루 12시간씩 일주일에 72시간을 ‘바퀴노동자’로 산다. 사회관계망서비스 페이지에 ‘운행일지’라는 제목으로 올라오는 그의 일상을 엿보노라면..